검색결과
  • (하)|주섭일 파리특파원 9일간의 견문기

    「크라쿠프」까지의 기차요금은 1백37「즐로티」(1천6백원). 손짓 발짓까지 동원, 「바르샤바」국제선 역에 당도하여 차표를 받고나니 어쩐지 「바르샤바」를 떠난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

    중앙일보

    1973.09.12 00:00

  • (10)동완|U대회대표단임원 동완 교수 방소 수기

    26일은 아침부터 잔뜩 찌푸린 날씨다. 떠날 준비를 한다고 해도 대수로울 것은 없다. 어제 저녁에 작성한 목록과 책들을 대조하면서 이곳으로 올 때 필요한 물품들을 넣었던 빈 종이

    중앙일보

    1973.09.08 00:00

  • 소, 솔제니친 미 발표작 압수

    【모스크바 6일 로이터합동】소련 수 폭의 아버지로 불리는 물리 학자「안드레이·사하로프」와 더불어 소련 체제에 대한 마지막 저항자로서 소련 당국의 공공연한 박해를 받고 있는「노벨」상

    중앙일보

    1973.09.07 00:00

  • (9)동완|U대회대표단임원 동완 교수 방소 수기|「크렘린」1948년과 1973년

    결사적 싸움은 끝났다. 단장 이하 임원·선수들은「레닌」경기장에 소련·미국 국기와 나란히 게양된 승리의 태극기를 쳐다보며 삶의 보람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숙소로 돌아와 내일 하루를

    중앙일보

    1973.09.07 00:00

  • (4)동완|U대회대표단임원 동완 교수 방소 수기

    배구선수들과 함께 숙소로 돌아와 점심식사를 끝마치니 벌써 저녁 7시에 시작되는 개회식장소인「레닌」중앙경기장 즉「루즈니키」로 떠날 시간이다. 우리선수단의 선두에 설 국기는 주최측에

    중앙일보

    1973.09.01 00:00

  • 28년만에 다시 본 소련-동완(2)

    『소련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국립「모스크바」대학교는 「러시아」어 세 낱말의 정식 명칭의 머리 글자만을 합쳐서 「엠계우」라고 부른다. 우리의 서울 운동장에 해당하는「레닌」중앙

    중앙일보

    1973.08.30 00:00

  • 본사 박중희·주섭일 특파원 체코·헝가리·루마니아·폴란드 순방

    중앙일보 「런던」주재 박중희 특파원은 「체코」·「헝가리」·「루마니아」를, 주섭일 「파리」주재 특파원은 「폴란드」를 각각 견문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들 동구 4개국 중 「체코」와

    중앙일보

    1973.08.27 00:00

  • 『심장의 소리』출간예정

    【파리19일 로이터 합동】지난 10일 뜻밖에 「파리」에 도착한 반정부적인 소련작가 「안드레이·시냐프스키」는 소련 강제수용소에서 지낸 그의 6년간의 생활기록을 기술한 5백 「페이지」

    중앙일보

    1973.08.21 00:00

  • (489)-미결의 종장(4)

    1954년 6월15일, 이날 「제네바」회의는 6·25 전쟁과 관련된 한국 문제를 정치적으로 타결할 가망이 없다는 것을 공식으로 선언하였다. 이는 곧 국토 분단선의 이름이 38선에서

    중앙일보

    1973.07.27 00:00

  • (485)인도군의 포로관리(10)|설득설전(6)

    설득 전쟁을 끝마친 2만 여명의 반공 포로들은 인도 군 관리아래 들어간지 1백 20일만인 54년 1월 20일 상오 10시 42분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비무

    중앙일보

    1973.07.18 00:00

  • (484)인도군의 포로 관리(9)|설득 설전(5)

    한국군 설득장교들의 친공 포로 설득은 12월 2일부터 11일까지 9일간에 걸쳐 전개됐다. 설득장에 나온 친공 포로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공산 학습에서 익힌 문제들을 앵무새처럼 떠들어

    중앙일보

    1973.07.17 00:00

  • 범죄 등 보도 못해|소 언론 규제 조항

    【뉴요크 15일 AFP동양】주간지인 「타임」지는 최근호에서 소련 정부가 소련 내 신문 및 TV 책임자들에게 당국의 사전 허락 없이는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한 「뉴스」 보도를 금지한다

    중앙일보

    1973.07.16 00:00

  • (483)|인도군의 포로 관리 (8)|설득 설전 (4)

    한국군 설득 장교단은 친공 포로들을 설득하는데 있어 「상대방과 자기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길 수 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는 손자병법을 적절히 원용했다. 즉 국군 출신 친공

    중앙일보

    1973.07.13 00:00

  • (481)|인도군의 포로 관리 (6)|설득 설전 (2)

    공산 측은 53년10월15일에 가서야 겨우 반공 포로들에 대한 첫 설득 작업을 시작하였다. 설득 장소 시비로 3주간을 허송한 공산군은 우선 중공군 출신 반공 포로들의 귀환 회유에

    중앙일보

    1973.07.09 00:00

  • (480)|인도군의 포로 관리 (5)|설득 설전 (1)

    중립지대 안의 반공 포로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인도군 포로 관리의 초점이었던 이른바 「설득 설전」에서도 개가를 올렸다. 우선 반공 청년단 조직과 수용소 단위로 편성된

    중앙일보

    1973.07.06 00:00

  • 반소작가 아말리크 복역 끝나자 또 재판

    반소작가로 낙인찍힌 「안드레이·아말리크」가 반소 선전 유포 혐의로 오는 10일 서부「시베리아」「탈라야」에서 또다시 재판을 받는다. 35세의 젊은 작가 「아말리크」는 3년간의 중노동

    중앙일보

    1973.07.06 00:00

  • (479) 중립지대안의 수용소(4)|인도군의 포로관리(4)

    공산측이 인도군에 인계한 송환 거부 「유엔」군 출신 친공포로는 한국군 3백35명, 미군 33명, 영군 1명의 도합 3백69명으로 귀환 불원 반공포로의 60분의 1도 안 되는 적은

    중앙일보

    1973.07.04 00:00

  • (478) 중립지대안의 수용소(3)|인도군의 포로관리(3)

    공산측은 10월초의 총격사건을 계기로 인도군에 대한 한국정부와 반공포로들의 감정이 가일층 악화되자 이를 교활하게 이용, 무력 충돌까지를 획책했다. 우선 그들은 인도군에 대한 태도를

    중앙일보

    1973.07.02 00:00

  • (477)|중립지대 안의 수용소(2)|인도군의 포로관리(2)

    53년10월1일과 2일.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 남방에 설치된 반공포로수용소에서 수명의 사망자와 10여명의 부상자를 낸 인도군의 「총격사건」은 또 한번 한국정부와 국민을 격노케 했다

    중앙일보

    1973.06.29 00:00

  • (476)|중립지대 안의 수용소(1)|인도군의 포로관리(1)

    휴전조인이 끝난지도 월서가 지난 53년9월초 인천 앞바다의 미 해군항공모함 갑판 위에는 30여대의 「헬리콥터」가 요란한 폭음을 내면서 북녘을 향해 부산하게 이항했다. 흰 「더번」을

    중앙일보

    1973.06.27 00:00

  • 형님 병상아 말문 잊은 중년이 감격의 포옹 6·25때 북한군에 강제징집 거제도선 철조망사이에 두고 수용 지금은 순박한 농부로 이젠 함께 살자.

    『형임!』『병상아,살아있었구나!』중년의 형제는 어린애처럼 얼싸안고 감격의 울음을 그칠줄 몰랐다. 6·18반공포로 석방때 자유의 몸에 안긴 형제가 반공 포로 석방 20주년을 맞은 1

    중앙일보

    1973.06.18 00:00

  • (470)휴전회담(후반부)(22)|한미관계의 긴장(2)

    포로관리의 직접 책임자인 「마크·W·클라크」「유엔」군 총사령관도 「아이젠하워」대통령에 이어 이승만대통령에게 6·18조치를 항의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아이크」

    중앙일보

    1973.06.13 00:00

  • (468)휴전회담(후반부)(21)

    (1)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석방은 휴전회담을 둘러싸고 그동안 가뜩이나 팽팽히 맞서오던 한·미 관계를 파국일보직전 상태로 몰아넣었다. 미국입장에서 볼 때 한국정부의 6·18포로석

    중앙일보

    1973.06.11 00:00

  • (467)휴전회담(후반부)(19)

    (11) 육지로 분리돼 나온 반공포로수용소에는 프로들의 석방탄원 혈서가 집더미처럼 쌓였고 그 보관소 근처는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대한반공청년단은 우익포로들이 52년 봄 거제도에

    중앙일보

    1973.06.06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