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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외교가의 DJ 김동조 외무

    우리는 영자이름 약칭으로 DJ라면 으레 金大中 前民主黨대표를일컫는다.그러나 DJ의 원조로 말하면 金東祚 前외무장관이다. 韓國 외교사에 DJ사단이 있다고 할만큼 金東祚씨는 50년대부

    중앙일보

    1994.02.20 00:00

  • 2.내가 겪은 김동조장관-최호중 前외무

    꼭 2년동안 외무부를 책임졌던 金東祚장관은 보스 기질이 강하고 뱃심좋은 이른바 DJ사단의 長이었지만 시운을 타지못해 2년동안 그다지 순탄치를 못했다. 金장관은 駐美대사로 있다가 1

    중앙일보

    1994.02.20 00:00

  • 새 축구협회장 정몽준 씨|"서울근교에 전용축구장 꼭 만들겠다"

    12일 힐튼호텔에서 개최된 92정기대의원총회에서 제47대 대한축구협회장에 만장일치로 추대된 정몽준(정몽준·42)국민당의원은『앞으로 4년 동안 한국축구를 이끌어 가야 할 막중한 책임

    중앙일보

    1993.01.13 00:00

  • 투병 시어머니 대신 유세지원(대선후보 내조24시:5·끝)

    ◎정주영후보 며느리 정몽준의원의 부인 김영명씨/새벽 3시 기상… 유권자 찾아다녀/정 후보 외국귀빈 만날땐 통역도 『아버님께서 그동안 잘 이끌어오신 대가족 덕을 요즘 톡톡히 보는것

    중앙일보

    1992.12.11 00:00

  • 모국초청 조총련계 재일교포 민단우세 〃분수령〃

    74년 8월L일 육영수여사가 오사카출신의 조총련계 재일동포 문세광의 총탄에 맞아 서거한 사건은 박정희의 내면세계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한 나라의 통치자로서 박대통령의 자세는

    중앙일보

    1992.08.14 00:00

  • 미·일 등 주요국 대사 이동 배경|"실무형 중용"…현안 해결 중점

    노태우 대통령은 지난달 말 우리 외교 망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주미·주일·주영·주유엔 대사 등을 새로 임명했다. 현홍주(미)·오재희(일)·이홍구(영)·노창희(유엔)씨가 그들.

    중앙일보

    1991.03.06 00:00

  • 주일대사

    한일관계에는 늘 빛과 그림자가 함께 드리워져 왔다. 우리는 한자와 불교·도자기문화등을일본에 전해 주었다는 자부심이있지만 임신왜난과 한일합방으로 뼈아픈 침달의 고통을 당하기도했다.

    중앙일보

    1991.01.11 00:00

  • 남북 총리회담 지켜본 예비회담 초대대표 김영주씨(일요인터뷰)

    ◎“대화 나섰지만 북은 북”/북 기본전략 불변… 환상 금물/80년엔 우리 정국 안정되자 접촉 거부 첫 싹이 튼지 10년 만에 분단이후 최초의 남북 총리회담이 5,6일 양일간 열렸다

    중앙일보

    1990.09.09 00:00

  • (4)외교서 「북한부담」벗어난다

    노태우대통령의 「7.7선언」은 한국외교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로 작용할 것으로 관측될만큼 질·양 양면에서 우리외교의 환경과 활동영역을 변화시킬 전망이다. 7.7선언은 ▲남북한간

    중앙일보

    1988.07.11 00:00

  • 외교협회원초청 환담

    최황수외무부장관은 18일 저녁 한남동 공관에서 김용식·김동조·이원경전외무장관 등 외교협회회원 1백50여명을 초청, 리셉션을 베풀고 환담.

    중앙일보

    1987.11.19 00:00

  • 한일회담 비사 담아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이『회상30년 한일회담』을 펴냈다. 한일회담 초기에 외무부 정무국장, 중기엔 외무차관, 최종타결때는 주일대사겸 수석대표로서 대일외교에 깊이 관여했던 그가 한

    중앙일보

    1986.11.19 00:00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제80화 한일회담 (207)|찻잔속의 해전|김동조

    『한국이 미불임금과 연금등 분명한 법적 근거를 가진 청구권만 요구키로 박·「이께다」회담에서 동의했다』는「이제끼」국장의 발언은 일본측이 박의장의 말을 자기네 유리한대로만 해석한 결과

    중앙일보

    1984.05.07 00:00

  • (3993)제80화 한일회담(192) 기상천외의 제의|김동조

    군사 정부의 초기 대일 자세는 한마디로 「순진무구」로 표현해도 좋을 만 했다. 군사 정부 지도자들은 과거의 우리 대일외교가 자유당때는 고집, 민주당때는 무능 때문에 잘 되지 않은

    중앙일보

    1984.04.17 00:00

  • (3976)-제80화 한일회담(175) 김동조|불가능한 집단귀국

    내가 모든 재일교포의 집단귀국을 추진하라는 이대통령의 지시에 이의를 감히 제기했던 이유는 세가지가 있다. 첫째 당시 재일교포 60만명의 성분을 분석하면 그것을 도저히 실현할수 없다

    중앙일보

    1984.03.27 00:00

  • (3975)-제80화 한일회담(174) 김동조|이대통령의 호출

    나는 59년9윌4일 경무대로 올라오라는 전갈을 받고 경무대현관으로 들어섰다. 현관에 막 들어서자 조정환외무장관과 홍진기법무장관이 나오고있었다. 조장관의 굳은 얼굴표정을 본순간 나는

    중앙일보

    1984.03.26 00:00

  • (3970)한일회담 한국대표단-제80화 한일회담(169)

    외무부는 이미 제어하기 힘든 상황으로 돌입한 북송 문제를 어떻게 하든 돌려보기 위해 한일회담 조기 재개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자니 연초 수석 대표직을 사임하고 유엔으로 귀임한 임병

    중앙일보

    1984.03.19 00:00

  • (3916)제80화 한일회담(115)

    나는 이대통령으로부터 애정에 없던「야쓰기」특사의 기자회견을 주선하라는 지시를 받고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엄명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지시에 당혹했던 데는

    중앙일보

    1984.01.16 00:00

  • (3880)제80화 한일회담(79)-김동조

    최근 젊은 대학생들 사이에『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가요가 널리 애창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나도 방송을 통해 이 노래를 몇번들었는데 그때마다 나로서는 남다른 감회에 젖게된다. 지금

    중앙일보

    1983.11.30 00:00

  • (3872)회담재개활동-제80화 한일회담(71)

    일본정부는 강경책를 수립하기는했으나 부산에 억류중인 5백여명의 자국민을 팽개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23일 일본외무성이 주일대표부에 보낸 공한은 서슬퍼런 강경책과는 거리가 먼 제의

    중앙일보

    1983.11.21 00:00

  • (3860)제80화 한일회담(59)일본측 대표단|김동조

    당시는 「재개한일회담」이라고 불린 제3차 회담은 1O윌6일 상오11시5분 일본외무성 419호실에서 양국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우리측에서는 수석대표에 김용식주일공사, 대표에

    중앙일보

    1983.11.07 00:00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849)-한일회담(제80화)

    지금까지 주로 지철근대표의 증언으로 평화선이 태동되기까지의 사연을 대강 살펴보았다. 이가운데 지대표가 관여하지 않았던 외교측면등 몇가지 점에 대해서는 추가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보

    중앙일보

    1983.10.25 00:00

  • (3844)제80화 한일회담(43)

    평화선에 대한 차철근씨의 증언계속이다. 『한일회담이 시작되던 51년 후반무렵 한국수역의 어장에는 한국배 보다 일본어선이 훨씬 많았다. 6·25동란으로 우리 어업은 그나마 명맥이 끊

    중앙일보

    1983.10.19 00:00

  • (3804) 제80화 한일회담(3) 우리측 대표들

    이 연재를 쓰기위해 정부가 1965년에 발간한 「한일회담백서」를 보니 만13년8개월간 7차에 걸친 회담에 참여한 우리측 대표의 연인원은 나를 포함해 68명이었다. 자연인으로는 46

    중앙일보

    1983.08.31 00:00

  • 한-일 각료회담|현해탄 사이에 둔 설전16년

    내주로 다가온 한일각료회의를 앞두고 현해탄을 가운데 둔 설전의 파고가 높다. 외교상 나오기 어려운 극언이 잇달아 일본측에서 나오는가 하면 우리국민의 대일감정도 그에 따라 만만찮게

    중앙일보

    1981.09.05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