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열전>2.내가 겪은 김동조장관-최호중 前외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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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꼭 2년동안 외무부를 책임졌던 金東祚장관은 보스 기질이 강하고 뱃심좋은 이른바 DJ사단의 長이었지만 시운을 타지못해 2년동안 그다지 순탄치를 못했다.
金장관은 駐美대사로 있다가 1973년말 장관자리에 올랐는데,다음해 8월15일 陸英修여사가 悲命으로 간 文世光사건이 발생했다.文世光이 재일동포였던 관계로 이 사건은 韓日간의 외교문제로비화됐고 金장관은 그 뱃심으로 강력한 교섭을 벌 여 일본정부의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받아냈다.그러나 온 국민의 분노가 워낙컸기 때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다음해 7월 비동맹회의의 北韓 가입및 연말 유엔총회의 남북한지지결의안의 동시통과라는 전무후무한 최악의 사태와 이변이 발생했다. 장관으로서는 이처럼 빛을 보지 못한데 반해 金장관은 大使로서는 명성을 크게 떨쳤다.韓日회담을 성공으로 이끈 주역으로큰 功을 세운 金대사는 대한민국 초대駐日대사를 지낸 후 駐美대사로 영전되어 우리 외교망의 핵심을 이루는 이 두자리 를 다 맡았던 유일한 존재가 됐다.
일본말이 유창했고 日本과는 여러가지로 인연이 많았던 金대사가東京에서 직책을 훌륭히 다한 것은 당연하다 하겠지만 영어에 그다지 能하지 못했고 美國과는 별로 인연이 없었던 金대사가 워싱턴에서도 중책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 이었다.권위있는 미국 주간지인 타임이 그 표지에 「워싱턴 외교계 스타」라는명목으로 5명의 대사 사진을 게재하면서 金대사를 포함시켰을 정도였으니까.
金장관은 두둑한 배짱으로 부하를 잘 거느렸다.나도 金장관을 국내외에서 여러번 가까이 모셨지만 金장관이 총애했던 부하들 가운데 盧信永.崔侊洙.李相玉,그리고 나 이렇게 네명의 외무장관,金東輝 상공장관,吳在熙.申東元 외무차관 등이 배 출됐다는 사실은 특기할만 하다.
퍽 오래전 외무부내에서 유행했던 재미있는 말이 기억난다.돌다리를 건너갈때 金溶植장관은 잘 두들겨본 다음 건너가고 崔圭夏장관은 남이 건너가는 것을 보고 나서 건너가는데 金東祚장관은「돌다리인데 괜찮겠지」하고 두들겨볼 것없이 건너간다는 比喩다.그 두둑한 배짱때문이었는지 金장관은 큰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쉽게 자리에서 물러났는데,그후 얼마 안돼서 나는 제네바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明倫洞 金장관댁에 귀국 인사차 들른 일이 있다.
그때 金장관이 한말이 인상적이었다.
『집에서 푹 쉬니까 좋기는 한데 타고다닐 자동차,나가앉을 사무실,차 심부름 해줄 여비서가 한꺼번에 몽땅 없어져 버려 좀 아쉽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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