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열전>2.외교가의 DJ 김동조 외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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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는 영자이름 약칭으로 DJ라면 으레 金大中 前民主黨대표를일컫는다.그러나 DJ의 원조로 말하면 金東祚 前외무장관이다.
韓國 외교사에 DJ사단이 있다고 할만큼 金東祚씨는 5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한국 외교를 주름잡았다.DJ사단이란 金씨가 만들어 놓은 경력과 인맥을 일컫는 일종의 집합명사다.먼저 왜 DJ산맥인지 따져보자.
지금까지 외무장관을 지낸 이는 모두 22명이다.한국 외교의 사정을 아는 이들은 그중 崔圭夏(14대).金溶植(10,15대).金東祚(16대)씨 3인을 3大 거물로 꼽는다.
3인중에서도 金東祚씨는 개성이 가장 강해 많은 일화를 남긴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51년 33세때 정무국장으로 외무부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차관을 거쳐 駐日(64~67년).駐美(67~73년)대사와 장관(73~75년).대통령 외교특 보(76~79년)를 지냈다.특히 3大 포스트인 장관과 美日 양국대사를 「석권」한 이는 그가 유일하다.
그의 경력은 겉모습 못지않게 내용도 묵직했다.「金東祚」하면 「韓日회담」이 연상될 정도로 그는 51~65년 14년동안 국교정상화를 위한 兩國교섭에 참여했다.64년 부터는 駐日대표부대사로 한국측 수석대표를 맡아 회담을 매듭지었다.韓 日회담은 「金-大平메모」로 매듭지어졌다고 세간에 알려져 있으나 14년간을 끈데서도 알수 있듯 難産에 난산의 마라톤회담이었다.그 난산의 회담을 마무리짓기 까지의 교섭 전략과 협상력의 상당부분이 그의몫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회담 이 타결된 후 그는 제2의李完用이니,민족 반역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金海 출신인 金씨는 日帝시대 日本 규슈大(九州帝大)재학중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고 慶南도청과장.체신부장관 비서실장을 거쳐 51년 외무부 정무국장이 됐다.
당시 정무국은 美洲局.亞洲局등 지금의 지역국과 국제기구국을 합칠 정도로 외무부의 중추부서였다.훗날 장관까지 오른 盧信永.
崔侊洙.崔浩中.李相玉씨등이 이시절 DJ사단으로 등록하게 된다.
金씨는 이때부터 외교를 손수 챙겼던 李承晩대통령의 신임을 쌓아가며 64년 駐日대표부대사가 될때까지 제1期 외무부 생활을 보냈다. 金씨의 제2期 시대는 駐日.駐美대사 시절이다.韓日회담을마무리 지은 金씨는 駐日대표부에서 격상한 駐日대사관의 초대대사를 3년간 맡았고 67년 외무장관으로 내정됐다가 駐美대사로 임명됐다. 朴正熙대통령 시절 오랫동안 장관을 지냈거나 實勢를 누린 이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그도 능력과 솜씨.배짱으로 대통령의신임을 얻어냈으며 이를 動力으로 성취의 街道를 달려나갔다.
그는 5.16혁명정권의 株主가 아니었다.朴대통령과 事前인연도없었다.그는 맨먼저 두둑한 뱃심으로 대통령의 마음을 잡았던 것같다. 64년 여름 朴대통령은 답답한 심경이었다.경제 개발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받아내기 위해 韓日국교 정상화를 서둘러야했는데 64년 6.3시위등 야당.학생의 거센 반대로 양국 회담은 지지부진했다.59년 외무차관을 그만 둔후 64년 무역진흥공사사장을 맡고 있던 金씨는 청와대에서 朴대통령과 점심을 같이 할 기회가 있었다.
『각하,회담이 제대로 되려면 현지 대사를 전폭적으로 밀어주어야 합니다.정치인이나 정보부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하는 얘기를 들어선 안됩니다.』 金씨는 하고싶은 얘기를 다 했다고 한다.金씨는 얼마후 전격적으로 駐日대표부대사겸 회담수석대표로 발탁됐다.그는 朴대통령에게 교섭 全權과 넉넉한 활동비를 요구했다.『日本사람들한테 얻어먹기만 해가지고선 대등한 교제가 어렵다』는 뜻이었다 .朴대통령은『목숨을 건다는 각오로 뛰어 65년6월까지 타결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과 친하니 애교스런 배짱도 가능했다.골프를 굉장히 즐겼던 金씨는 駐美대사 시절 美정계 인사들과 사귀기 위해 고급골프클럽에 들어가려 했다.그런데 회원권이 3천달러나 됐다.金대사는바로 朴대통령에게『돈좀 보내달라』는 편지를 썼고 朴대통령은 파격으로 비자금 금고에서 이를 보내주었다.
그가 駐美대사로 봉직한 67~73년은 여러가지 정치.안보상황이 발생했던 격동기였다.북한은 무장 게릴라들을 보내 남한을 습격하는데도 美國은 71년3월 7사단을 빼내갔다.72년엔 10월유신,73년8월엔 金大中납치사건등이 터졌다.그는 미국에 유신을설득하고 일부 재미교포들의 反정부시위를 견뎌내야 했다.
駐美대사관에서 그의 재임을 지켜보았던 이들은 金씨가 특유의 친화력으로 美국무부.의회.언론계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했다고 증언하고 있다.維新독재를 중화하기 위한 그의 이같은 적극적 활동은 나중에 美의회의 朴東宣로비사건(코리아 게이트) 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곤욕을 치러야 했다.사실 金씨는 중앙정보부가 朴씨를 對美로비이스트로 활용하려 했을 때 이에 반대했고 對美로비라는 측면에선 朴씨와 늘 경쟁적 관계에 있었지만 70년대 후반 美의회는 그를 직접 청문회에 세우려고 압박했다.그는 끝내 외교관 면책특권을 이용,서면증언으로 매듭지었다.전직 고위 외무부 인사는『朴대통령도 그런 그를 美國에서 빼내기 싫어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73년 장관이 된 그는 외무부 국장급 이상을 고시출신으로 거의 채워 파란을 일으켰다.그는 웬만한 문제는 모두 실무자들의 전결사항으로 넘겨 線이 굵다는 그의 성격을 선명하게 심었다.그런 金장관도 2년간의 장관시절 時運이 따라주지 않 아 외교관생활 최악의 홍역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그리고 그의 명성이 깎이는 大실패도 경험했다.
첫번째 高難度 숙제는 74년 8월15일 터진 조총련 테러리스트 文世光의 陸英修여사 암살사건이었다.『법적.도의적 책임이 없다』는 日本에 대해 국민의 분노는 끓어올랐고 朴대통령은『日本이사죄하지 않으면 단교선언까지 준비하라』고 지시했 다.
단교문서를 가지고 청와대에 올라간 金장관은 朴대통령에게『실리가 없다』며 단 교구상 철회를 건의했다.
金씨 인생의 최대 악몽은 75년8월 페루 리마에서 열린 비동맹 외상회의였다.전성기에 진입한 제3세계의 연대가 무르익는 가운데 그해 4월 베트콩의 월남전 승리 여세까지 몰아 북한은 비동맹회의에 전격 가입신청을 냈다.金장관은 참모 의 견에다 자신의 뱃심을 실어 우리의 가입신청으로 맞장구를 쳤다.金장관은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현지에 가서 全面戰을 벌였으나 제3세계 세력이 주축인 비동맹회의는 북한만 받아들였다.당시 金泳三新民黨총재는 이를「중대한 외교실책」이라고 몰 아붙였다.
악몽은 또 찾아왔다.그해 12월 유엔은 남한.북한측 결의안을동시에 통과시켰다.金장관은 서울로 돌아와 장관직을 물러나야 했다. 76~79년 대통령 외교특보시절 그는 朴振煥농촌특보등과 함께 朴대통령의 술친구였다.오랜 외교관 생활로 마티니.코냑등 양주에 입맛이 길들여진 金특보는 솔직히 매번 술상에 오르는 막걸리가 별로 반갑지 않았다.그래서 그는 朴대통령에게 시바스 리갈을 권했고 이 술은 79년 10.26 宮井洞현장까지 朴대통령의 사랑을 받았다.
81년 油開公사장을 끝으로 공공생활을 마감한 金씨는 92년 사돈인 鄭周永 국민당대통령후보(鄭씨 아들 鄭夢準국회의원이 그의사위)의 선거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金 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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