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0)제80화 한일회담(79)-김동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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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최근 젊은 대학생들 사이에『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가요가 널리 애창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나도 방송을 통해 이 노래를 몇번들었는데 그때마다 나로서는 남다른 감회에 젖게된다.
지금도 일본이 관성 비슷하게 우리 정부에 자기네 땅이라고 생떼와 억지를 부리는 외교문서를 보내곤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애당초부터 우리로서는 독도문제를 놓고 일본과 영토 분쟁에 휩싸일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자세였고 지금도 그 점에서는 정부의 태도가 변하지도, 변할 수도 없는 것은 불변의 진리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일회담이 열리던 50년대 초반은 물론 제3차 회담이 결렬된 직후의 2, 3년간 일본은 독도 문제을 집요하게 불고 늘어졌다.
사실 우리로선 그들의 엉뚱한 주장에 대거리를 하는 것이 무익한 일이었으나 국제사회란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아 그에 대응하는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한일회담을 통해 독도문제가 제기된 것은 53년4월15일부터 시작된 제2차 회담 때 였다. 그때 우리측 수석대표였던 김용식 주일공사는 일본이 독도문제를 회제에 포함시키자고 했을 때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그것은 내정간섭이니 의제포함은 어불성설이라고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즉『도둑이 지나가는 신사의 금시계를 보자고 한 뒤에 자기 물건이라고 생떼를 쓰기 시작했다고 해보자. 그 신사는「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해 버렸는데 상대방 도둑은 그 신사에게 그러면 재판소에 가서 누구의 물건인가 재판을 해보자고 억지를 부린다 해서 재판소에 따라 갈 신사가 있겠는가』고 반박했던 것으로 알고있다.
독도는 울릉도 동남쪽 약50해리의 북위 37도9분30초, 동경1백31도5분의 지점에 위치해 있는 울릉도 부속 도서다.
두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위에 수십 개의 암초가 있는 면적 6만9천9백90평에 불과한 조그마한 섬이다.
일본측은 독도를 다께시마라고 부르고 도근현서기군오개촌에 속한다고 생떼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울릉도의 서북방 약86해리에 독도가 위치해 있다.
물론 그 주장은 일제가 조선조를 거의 집어삼킨 것이나 다름없는 1905년 도량현 고시로 슬쩍 도근현에 독도를 편입시킨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2차 회담에서 일본측이 독도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53년 초에 확정한 평화선 안에 독도를 편입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평화선 확정을 놓고 나를 중심으로 상공부 심철양 수산국장과 해군 관계자들이 협의했을 때 나는 독도를 꼭 평화선 안에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칭 평화선의 변영태 추가 안은 이래서 나온 것이다.
유진오 선생이 이미 밝혔듯이 당시 정부는「맥아더·라인」이 철폐될 것에 대비해 그에 맞설 대책을 모색했는데 그것이 평화선 확정이었다.
최초의 평화선 안이 52년 가을 각의를 통과해 이 대통령의 재가에 돌려졌을 때 이 박사는 『「맥아더」장군이 나에게 한 말이 있는데 이게 무슨 필요가 있는가』하며 동의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거부로 햇빛을 못 본 후 나는 당시 외무부 정무국장으로서 제1차 한일회담의 전문위원으로 동경회담에 참석했는데 그때 일본측의 태도를 보니 평화선이 확정되지 않을 경우 앞으로 한일간에 엄청난 문제를 발생시킬 것이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유박사 등과 다시 이 문제를 토의한 후 그 해말 일시 귀국한 틈을 타 변영태 장관을 움직였다.
나는 이번에는 꼭 이박사의 재가를 받도록 하기 위해 경무대의 임철호 비서관에게 사전에 평화선 선포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충분히 설명해 그가 이 박사를 움직이도록 공작했던 일이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임 비서관은 나의 말을 듣고 최선을 다 할 터이니 걱정 말라고 나를 위로했다.
임씨의 적극적인 호응과 장면총리·변영태 외무·김준연 법무장관 등의 설득에 따라 53년1월18일 마침내「가만」(이박사의 재가사인)이 내려졌던 것이다.<계속>【김동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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