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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마트 의무휴업 때문에 시금치 2만 단 갈아엎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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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상추나 샐러리·케일 같은 쌈채류를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는 경기도 용인의 조은영농 조합원 10여 명은 올해 소득이 반 토막 났다. 쌈채류를 직거래하던 롯데마트가 대형마트 영업규제에 걸려 4월부터 매달 두 차례씩 문을 닫으면서 납품량이 확 줄었기 때문이다. 조은영농 우미라 대표는 19일 “대형마트 휴무 전까지 매달 3억원 정도이던 소득이 4월부터 1억5000만원으로 떨어졌다. 15명이던 직원 중 6명을 줄였고 비닐하우스 난방비도 안 나와 빚더미 위에 앉을 판”이라고 말했다. 또 “전통시장에다 내다 팔려고 했지만 쌈채류는 유통기간이 짧고 수요도 많지 않아 매달 수확량의 30%를 폐기처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국 지방자치단체에서 4월부터 시작된 대형마트와 기업형수퍼마켓(SSM)의 영업규제로 엉뚱한 중소기업이나 농·수·축산 농가의 피해가 커지고 있다. 지자체는 전통시장과 골목상권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대형마트나 SSM에 납품하던 중소업체나 농어민들이 덤터기를 쓰고 있는 것이다. 특히 최근 정치권이 대형마트의 영업시간과 의무휴무를 더욱 강화하는 유통산업발전법 일부개정안을 처리할 움직임을 보이면서 피해 우려가 더욱 커지고 있다. 국회 지식경제위원회는 16일 대형마트와 SSM의 의무휴무를 늘리고 영업제한시간을 강화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처리했다. 국회 일정대로라면 개정안은 법사위를 거쳐 23일께 본회의에 상정돼 통과될 경우 내년 1월부터 시행된다.

 부산의 어묵공장인 늘푸른바다는 예년보다 올 매출이 20% 정도 줄었다. 이 회사 윤훈 영업팀장은 “대형마트가 매출이 주니 주문량을 자꾸 줄이는 판에 휴무일을 더 늘리면 우리 같은 작은 업체만 죽는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대형업체와 달리 마케팅력이 떨어지는 작은 업체는 대형마트 외에는 팔 곳이 없다”며 “벌써 작은 식품업체는 구조조정에 들어간 곳도 많다”고 전했다.

경기도 남양주에서 시금치 농사를 짓는 이이붕씨는 “내년 대형마트 휴무일이 늘면 납품 물량이 더 줄어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9월에도 대형마트 휴무 때문에 시금치 2만 단을 폐기처분했다. 대형마트에서 한 단에 600~700원인 시금치를 의무휴업 때문에 수확하지 못해 도매시장에 팔려고 했지만 도매시장이 출하시기가 늦어 상품성이 떨어진다며 100원을 불러 밭을 갈아엎은 것이다.

 대형마트 역시 의무휴무로 매출액 감소 피해를 봤다. 이마트의 경우 전국 130개 매장 중 약 70%가 두 번 휴무한 6월 한 달 동안 약 850억원의 매출이 줄었다. 이 중 농산물 매출 감소분이 206억원가량 된다. 또 중소업체나 안경·세탁소처럼 입점업체 매출이 약 320억원 감소했다. 한국체인스토어협회 측은 내년 대형마트와 SSM의 영업규제가 강화되면 한 해 7조8000억원가량의 매출이 줄 것으로 보고 있다.

대형마트 관계자는 “의무휴무가 확대되면 소비자가 소비를 아예 포기해 소비 위축과 경기침체가 더욱 심해질 것이며 협력업체 직원과 아르바이트 같은 일자리가 줄어 생계형 근로자의 고용이 더욱 감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의 대형마트 영업규제 강화로 대형마트와 소상공인들이 자율적으로 추진하던 상생 방안마저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지식경제부와 대형마트·전국상인연합회는 지난달부터 유통산업발전협의회를 구성해 상생 방안을 협의해왔다. 지난 14일에는 2015년까지 대형마트와 SSM의 신규 출점을 자제한다는 합의를 도출해냈다. 하지만 상인연합회는 19일 상생 합의 파기와 유통산업발전협의회 탈퇴를 선언했다. 상인연합회 진병호 회장은 “국회가 자율적인 합의 발표 하루 만에 더 강력한 규제법안을 내놓자 기존 합의를 파기하자는 회원들의 요구가 컸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난감하다는 입장이다. 지경부 관계자는 “정치권이 정부와 대·중소업체 간 자율적 합의를 무시하고 정서법으로 규제 법안을 처리한 것 같다”며 “정치권 규제대로라면 또 다른 중소입점업체나 농민 피해가 발생해 소상공인 간 형평성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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