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習近平) 시대가 열림에 따라 태자당(太子黨·혁명 원로나 고위 공직자 후손들로 이뤄진 파벌)이 명실공히 중국 최고 권력의 핵심이 됐다.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나 리펑(李鵬) 전 총리가 사망한 혁명열사의 유족이긴 했지만 이전까지 부친 등의 직접적인 후광을 입고 최고 권부에 오른 이는 쩡칭훙(曾慶紅·쩡산 전 내정부장 아들) 전 국가부주석 정도가 대표적이었다.
시진핑의 주변엔 당·정·군에 걸쳐 광범위한 태자당 세력이 형성돼 있다. 이 중 예쉬안닝(葉選寧·74) 예비역 소장과 후더핑(胡德平·70)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상무위원은 시진핑의 막후 핵심 측근으로 꼽힌다. 예쉬안닝은 당 중앙군사위 부주석과 정치국 상무위원을 지냈고 마오쩌둥(毛澤東) 사후 4인방 검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예젠잉(葉劍英) 원수의 아들이다.
예쉬안닝은 시진핑이 군을 장악할 수 있도록 핵심 인사들을 연결시켜 줬다. 대표적 인물이 쉬차이허우(徐才厚) 군사위 부주석과 장하이양(張海陽) 제2포병(핵 등 전략무기 담당) 정치위원이다. 홍콩 매체들에 따르면 지난해 쉬차이허우는 중앙군사위 부주석이 된 시진핑을 수행해 자신의 세력 기반인 선양군구(軍區)를 돌며 간부들이 시진핑에게 충성을 맹세케 했다. 예쉬안닝은 1990~97년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연락부장으로 있으며 3000명의 태자당 인사들을 해외로 유학 보내 양성했고, 이들의 명단을 시진핑에게 넘겨 친위세력으로 관리케 했다고 한다.
후더핑은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의 장남이다. 개혁가였던 아버지 성향을 이어받아 공산당의 지배력 제한을 주장하는 등 당내 민주화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낸다. 후야오방은 정치적으로 복권되지 않았지만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모두 그를 상관으로 모신 전력이 있어 후더핑의 영향력도 만만치 않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시진핑은 올해 두 차례 개인적으로 후더핑을 찾아가 개혁에 관한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이들 세 집안은 끈끈한 인연으로 묶여 있다.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는 87년 후야오방이 덩샤오핑(鄧小平) 등 원로들의 공격을 받고 실각할 때 거의 유일하게 후를 두둔한 인물이다. 시진핑이 85년 허베이성 정딩(正定)현 서기에서 푸젠성 샤먼(厦門)시 부시장으로 영전한 건 후야오방의 배려였다. 예젠잉과 시중쉰은 군에서 항일전쟁과 내전을 함께 치른 동지다.
뉴욕타임스는 예젠잉 등 4인방 검거에 참여한 이들의 자녀로 구성된 태자당 모임에서 ‘공산당이 너무 썩었으며 인민들과 동떨어져 있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