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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소설로 돌아온 ‘게임 폐인’ 소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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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8년 만에 내놓은 장편 『지옥설계도』에서 이인화는 소설과 게임, 현실과 가상이 맞물리며 이야기를 넓혀가는 새로운 형태의 서사방식을 시도했다. [사진작가 박근정]

세상을 향해 하고 싶었던 말이 차곡차곡 고였던 것일까. 8년 만에 장편소설 『지옥설계도』(해냄)를 펴낸 작가 이인화(46)는 13일 “가슴에서 폭풍 같은 감정이 흘러나와 글이 수돗물처럼 쏟아졌다”고 했다.

 영어 등 7개 국어로 번역된 밀리언셀러 『영원한 제국』의 작가인 그는 2004년 『하비로』이후 문단을 떠나 있었다. 2003년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를 창설하고, 2004년 리니지 게임 서버에서 펼쳐진 ‘바츠 해방 전쟁’에 참여하는 등 게임에 몰두했다.

 자칭 ‘게임 폐인’ 이라 할 만큼 온라인 에 빠져 있던 그가 아날로그 공간으로 회귀한 까닭은 무엇일까.

 “오랜 시간 젊은 세대와 게임을 하다 보니 마음의 무늬가 보였어요. 젊은 세대의 말 못할 고민과 그들의 무의식을 전달하고 싶었죠. ‘게임 폐인’으로 불리는 젊은이들이 가상 세계에서 발휘하는 영웅적인 면모나 초인적인 지능을 현실 속에서도 펼쳤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지옥설계도』에는 일반인보다 10배 이상의 지능을 가진 강화인간, 강화인간이 사회 개조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만든 비밀조직인 공생당, 이들을 둘러싼 현실세계의 살인사건, 그리고 최면으로 구현된 가상세계 ‘인페르노 나인’ 등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현대의 추리극과 중세의 전쟁 드라마가 촘촘하게 맞물린다.

 이번 작품은 여러모로 독특하다. 스릴러와 추리·판타지·공상과학(SF)이 뒤섞인 데다 소설과 게임의 융합이 시도됐다.

소설이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면서 또한 게임이 펼쳐지는 무한한 공간과 시간의 일부분이 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새로운 서사방식이다. 그가 교수로 있는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가 개발한 ‘스토리 헬퍼(Story Helper)’를 창작에 활용했다. ‘스토리 헬퍼’는 205개의 스토리 모티브와 3만4000개의 모티브 데이터베이스(DB)가 든 컴퓨터 프로그램. 여기에 스토리의 얼개를 넘으면 기존의 영화나 소설 등에 등장했던 스토리와 비슷한 정도를 알려준다. ‘작가가 머릿속에 그려본 사건이 너무 진부하니 쓰지 말라’고 조언하는 일종의 필터링 시스템이다.

 “새로운 사건을 구상한 뒤에 스토리 헬퍼로 시뮬레이션을 해요. 기존의 이야기와 55% 이상 비슷하다는 결과를 얻으면 소설에 쓰지 않았어요. 독자의 기억 속에 잠재돼 있는 모든 전개 방식을 미리 예측하고, 그러한 기대를 뛰어넘는 사건을 쓰기 위한 것이었죠.”

 그는 이를 모바일의 시대의 서술 방식이라고 규정했다.

 “모바일 콘텐트는 DB를 파는 시장이에요. 소설도 네버엔딩 스토리에요. 전체 DB를 다 준비하고 소설을 쓰는 거죠. 인페르노 나인 15개 주의 역사와 등장인물, 4대 권력의 갈등을 모두 다 쓰고 만든 뒤 그 중 일부만을 소설로 담았을 뿐이에요. 더 깊이 알고 싶으면 다른 DB를 찾게 되는 걸 염두에 둔 거죠.”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미국 크루인터랙티브의 웹전략 게임 인페르노 나인(Inferno Ⅸ)은 내년 1월 출시된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창작에 활용했음에도 그는 전지전능한 작가의 영역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개성 있고 독창적인 ‘불멸의 캐릭터’입니다. 그 밑에 깔린 것은 작가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디테일과 작가의 통찰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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