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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중국엔 예술품 소장가가 없다, 투자자뿐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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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90년 5월 중국 미술가 쉬빙이 이끄는 팀이 만리장성을 탁본하던 모습. 대형 화선지에 찍은 만리장성은 그대로 전시장의 설치미술이 됐다. 제목은 ‘귀신이 벽을 때리다’. 정치성을 씻어내고 문자의 기원과 예술의 존재 이유를 숙고하는 단계로 접어든 중국 현대미술 격동기의 작품이다. [사진 학고재]

‘윤길남(尹吉男)’이라 쓰고, ‘인지난’이라고 읽는다. 중국 최고 미술대학인 베이징 중앙미술학원 인지난(54·미술사) 인문대 학장 얘기다.

 부모의 고향은 각각 경남 통영과 평북 용천이다. 조선어를 할 줄 모르는 조선족, 그래서인지 그의 평론에서는 비주류의 시선, 이념의 권위를 뒤집어 엎으려는 풍자가 돋보인다. 서구 이론으로 중국 문화현상을 설명하려는 태도를 ‘계모주의(step-motherism)’라고 비판하며 날을 세우기도 했다.

 대표적 비평집은 『홀로 문을 두드리다』. 중국 미술의 격동기인 1985∼93년 사이에 발표한 평론을 엮었다. 개혁·개방 이후 표현의 욕망이 터져 나오던 전환기에 나온 글이다. ‘문화대혁명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비평집’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중국 내 예술평론서 출판 사상 최다 인쇄 수를 기록했다. 중앙미술학원을 비롯한 미대생들의 필독서로 꼽힌다. 공식적으로 5만부를 찍었고, 해적판을 포함하면 그보다 4∼5배 많은 책이 중국 내에서 유통되는 걸로 알려져 있다.

인지난

 이 책이 최근 국내에 번역·출간(김태만 옮김, 학고재)됐다. 중국 현대미술이 어떻게 태동했고, 현장에서는 어떻게 읽혔는지 궁금할 독자들이 정독할 만하다. 인 교수를 만났다.

 - 1990년 전후의 글을 모았다. 20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 독자들이 어떻게 읽길 바라나.

 “그 8년간은 중국 현대미술에서 아주 특수한 시기였다. ‘역사’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또한 나와 거기서 다룬 작가들 대부분이 중앙미술학원 출신이다. 중국 현대 미술사는 중앙미술학원의 역사라고도 한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조용히 지켜보고(靜觀) 쓴 책이다.”

 실제로 1990년 전후는 중국 미술의 격동기였다. 천안문(天安門) 사태와 개방 이후 예술은 더 이상 정치 선전의 도구로 쓰이지 않아도 됐다. 현대 미술가들은 미술 스스로를 돌아봤다. 문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던 문화혁명의 경험을 녹여, 보는 것과 읽는 것의 역사를 관조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룬 쉬빙(57) 현 중앙미술학원 부원장을 비롯해 구원다·황융핑 등이 이러한 ‘뉴웨이브’의 대표 주자였다.

 1990년 5월 쉬빙은 25일간 만리장성을 탁본했다. 먹물 300병, 1300장의 창호지와 화선지, 그리고 많은 사람이 동원됐다. 1000㎡의 탁본지는 차로 실어 날라야 했다. 참가자들은 이 프로젝트를 ‘만리장성 감옥’이라고 불렀다. 80년대 이미 자신이 고안한 4000여 개의 문자를 사용해 읽을 수 없는 책을 만든 ‘천서(天書)’로 이름을 날린 그는 “예술은 인류가 어떻게 ‘세월을 보내느냐’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 프로젝트의 제목은 ‘귀신이 벽을 때리다’.

 같은 시기 류샤오둥(劉小東·49)은 베이징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생활 반경 내의 친구 혹은 동료를 모델로 삼은 사실적 인물화를 내놓았다. 중국 예술계는 이 시기를 ‘예술 선언 없는 리얼리즘 시기’라고 불렀다. 문화혁명을 겪지 않은 류샤오둥·장샤오강(張曉剛)·왕진쑹(王勁松)의 세대는 ‘포스트 뉴웨이브’라고 불린다.

 정치적 트라우마 없이 근거리에서 생활을 관조하는 이들 신세대 예술가들을 인 교수는 ‘신생대’라고 명명했다. 고고학을 전공했고, 고미술 감정에도 조예가 깊은 그가 지질학에서 차용한 용어다.

 - 중국 현대미술의 고가 행진은 거품인가.

 “요즘 중국엔 예술품 소장가가 없다. 있는 것은 투자자뿐이다. 이들은 잘 팔리는 작품, 투자 가치가 있는 것을 사들인다. 예술품이 아니라 상품이다. 그런 면에서 중국 현대 미술의 가격 폭등은 거품이다. 얼마 전에도 웨민쥔·쩡판쯔 등이 홍콩 경매에서 가격이 폭락할까 봐 직접 자기 작품을 사들여 구설에 올랐다.”

 - 좋은 평론이란.

 “작품을 설명하거나 해독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작품을 통해 자기를 이야기하며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글이다.”

 - 그렇다면 좋은 작품은.

 “사람들이 보고 단번에 갖고 싶어하지만, 작가는 가장 주기 싫어하는 작품이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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