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2일 외교안보를 주제로 한 마지막 미국 대선 TV토론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중국은 ‘adversary’일 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파트너다. 국제 공동체의 규칙을 중국이 따른다면 중국은 파트너다”라고 발언했다. 여기서 ‘adversary’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한국의 많은 언론이 적(敵)이라고 번역했다. 오역에 가까운 번역이다. 미국 대통령이 미국과 더불어 G2인 중국을 대놓고 적(敵·enemy)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이상하다. 중국 언론은 ‘adversary’를 대수(對手)라고 옮겼다. 적수(敵手), 상대(相對)라는 뜻이다.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었는지 모르지만 중국은 오바마의 발언에 대해 별다른 반응 없이 넘어갔다.
새 시대를 연 거목들 <25> 카를 슈미트
‘adversary’의 동의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친구이자 적’을 의미하는 ‘프레너미(frenemy=friend+enemy)’다. 1953년 미국-소련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처음 등장한 용어다. 미국 언론은 지난해부터 프레너미를 미·중 관계에 적용하고 있다. 프레너미는 어쩌면 전환기적 상태다. 친구면 친구, 적이면 적이 되는 게 보다 일상적·안정적이지 않을까.
정치를 친구와 적의 문제로 체계화한 인물은 독일 헌법학자·정치학자인 카를 슈미트(1888~1985)다. 슈미트는 가장 독창적인 유럽 사상가, 가장 중요한 20세기 사상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최근 그가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그의 사상사적 중요성은 점점 증대할 전망이다.
정치의 화두는 ‘적을 어떻게 할 것인가’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이 친구와 적의 구분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본다. 도덕적인 것은 선악, 미학적인 것은 미추(美醜)의 차이에서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것’은 적과 친구의 구분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다. 여기서 슈미트는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정치란 적과 친구의 대립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적은 말살해야 할 대상일 수도, 구슬려 내편으로 포섭할 대상일 수도, 평화공존의 대상일 수도 있다. 그걸 선택하는 게 정치다. 뭘 선택할지가 정치의 화두다. 어떤 선택이든 정치는 ‘친구 vs 적’이라는 구조적인 범주의 차이에서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슈미트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본질을 꿰뚫는 사상의 보고임에도 불구하고 슈미트가 무시된 이유는 그가 1933~36년 기간에 나치와 협력했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권력을 잡기 전에는 나치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않았다. 1933년 나치스당에 가입하고 나치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슈미트는 한때 나치의 ‘계관 법학자(Kronjurist·Crown Jurist)’였다. 1936년 나치 친위대(SS)는 그를 기회주의자, 출세주의자라고 맹공했다. ‘출세를 위해 나치를 지지하는 척한다’는 공격이 개시됐다. 과거에 나치의 인종 이론을 비판한 여러 발언이 문제시됐다. 슈미트는 반유대주의자였지만 나치가 보기에는 선명성이 부족했다.
‘계관 법학자’ 자리를 박탈당한 그는 교수직에 만족해야 했다. 독일의 패전으로 소련군·미군에게 붙잡힌 슈미트는 1년 이상 포로수용소에서 지냈다. 풀려난 슈미트는 ‘전향’을 거부했다. 더 이상 교수 생활을 하지 못하고 국제법 연구에 몰두하다 1985년 97세 나이로 사망했다. 슈미트는 ‘자유주의적 세계주의(liberal cosmopolitanism)’가 국제 질서의 법적 기반을 뒤흔들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우파 사상계의 존경을 받았다.
유럽에서 슈미트는 항상 중요한 인물이었다. 미국에서 일반인들에게는 ‘무명’이었으나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다. 그의 복지국가 비판은 오스트리아 태생 영국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1899~1992)를 통해 미국 보수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최근 미국 학계는 그를 ‘노골적’으로 주목하고 있다. 한 가지 계기는 그가 미국 신보수주의(네오콘·neo-conservatism)의 사상적 뿌리가 아닌가 하는 논란이다.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에 관여한 인물 중에는 시카고대 정치학과 교수였던 리오 스트라우스(1899~1973)의 제자가 유난히 많다. 신보수주의를 주도한 폴 울포위츠가 대표적이다. 스트라우스가 슈미트의 ‘제자’이기 때문에 신보수주의자들은 나치 이론가인 슈미트의 ‘손자뻘 제자’라는 주장이다.
그럴듯하지만 억지스러운 주장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막스 베버(1864~1920)는 네오콘의 증조할아버지다. 슈미트는 막스 베버의 영향도 받았다. 슈미트는 스트라우스를 높이 평가해 스트라우스가 유학을 떠나는 데 필요한 장학금을 받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스트라우스는 슈미트의 제자라기보다는 슈미트 사상의 극단적인 성향에 반대한 동료였다.
어떤 면에선 스트라우스가 슈미트 주장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스트라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서구 민주국가들에게 안전한 곳으로 만들려면 전 세계를 민주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라 하나하나뿐만 아니라 국제사회 전체가 민주적이 돼야 한다.”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는 논리 전개다. ‘비민주국가, 독재국가는 적이다. 적이 있으면 싸우게 되며 내 안보가 위협받는다. 모든 적을 민주국가로 만들면 모두 내 친구가 돼 싸울 일이 없어진다.’
“미 헌법 이론가는 매디슨 아닌 슈미트”
시카고대 로스쿨의 에릭 포즈너 교수와 하버드대 에이드리언 버뮬 교수는 공저
슈미트는 제3세계 권위주의 체제를 옹호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도 남겼다. 1921년
슈미트의 정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는 종교다. 슈미트의 사상에서는 강한 종교성이 발견된다. 그는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어른이 되며 가톨릭 신앙을 버렸으나 그에게는 강한 가톨릭성이 발견된다. 그에게 교회는 국가의 모델이었다. 슈미트에게 정치는 ‘솔루션’이 아니라 구원이었다.
정치권에서는 ‘편 가르기’를 하지 말자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오바마의 정적들은 오바마야말로 편 가르기를 좋아하는 인물이라고 공격한다. 정치에서 적과 친구가 있는 한, 온 세계가 친구가 되기까지 카를 슈미트는 항상 재해석돼야 하는 인물이다.
민주국가의 선거정치도 결국엔 편 가르기 정치다. 2008년 미국 대선에서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냐,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냐가 화두였다. 인종, 지역, 남성·여성의 차이인 젠더(gender), 복지와 같은 문제는 ‘정치화(politicization)’를 겪기 전에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정치 행위의 영역 바깥에 위치하다 정치화 과정을 겪으면 정치가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야 할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