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경제민주화보다 급한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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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호 31면

‘경제민주화’에 대한 한국 유권자의 지지는 상당하다. 유력 대선 주자들은 경쟁적으로 경제민주화를 강조한다. 하지만 경제민주화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이룰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사실상 없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은 경제민주화라는 단어가 경제학 분야에서는 쓰지 않는 용어인 탓도 크다. 그래서 뜻 풀이를 두고 혼선이 빚어지기도 한다. 대선 주자들이 경제민주화를 말할 때 강조하는 것은 재벌에 대한 통제다. 하지만 이 역시 세부적으로 어디까지 어떻게 재벌을 통제할 것인지 합의할 수 있을지 의문이고, 혹 그런 합의가 이뤄진다고 해도 기업 개혁이 ‘경제민주화’를 바라는 일반 대중의 요구에 얼마나 부합할지 의문스럽다.

한국은 소득불평등과 상대적 빈곤이 심화하고 있다. 선진국 가운데 복지 정책이 가장 부족한 나라 중 한 곳으로 꼽힌다. 물론 한국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이런 이슈를 잘 다루고 있다.

최근 아시아재단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아시아 개발은행(ADB) 주최로 열린 콘퍼런스에서 ADB의 이코노미스트인 좡주중은 “아시아의 빠른 성장은 절대적 빈곤은 빠르게 해소했다. 하지만 소득 불평등이 확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빈부 격차의 심화가 중산층을 없애고 시민연대 의식을 약화시켰을 뿐 아니라 비효율적인 포퓰리즘 정책들을 양산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과 인도는 가장 분명한 사례다. 중국 런민대의 왕싼구이 교수는 “지난 30년간 수억 명의 중국인이 빈곤에서 벗어났지만 소득 불균형은 절망적인 수준으로 악화됐다”고 지적했다. 최근 중국에서 소요가 늘어나는 것은 이런 탓도 있다. 인도를 보자. 1인당 국민소득은 지난 10년 동안 세 배 증가했다. 빈곤은 꾸준히 감소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수억 명의 사람이 가난에서 허덕인다.

중국·인도에 비하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선진국에 비하면 한참 뒤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의 실업률은 낮은 편이나 실업자의 3분의 1만이 실업 수당을 받는다. 더 놀라운 건 노인층 절반이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11%를 사회복지 비용으로 쓰고 있지만 다른 선진국에 비해 여전히 낮다. 저소득층에 정부가 지급하는 수당도 OECD 국가 중 가장 낮다. 무상급식을 받지 않아도 될 학생들에게 들어가는 예산을 이처럼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국의 의료보험은 미국보다 앞서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겐 여전히 큰 부담이다. 의료 부담의 상한선을 두는 것이 저소득 가정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 격차도 한국이 풀어야 할 과제 가운데 하나다. 한국 기업들이 비정규직을 쓰는 비율은 선진국 기업에 비해 상당히 높다. 정규직의 고용 보호가 엄격하고 임금이 높기 때문이다. OECD는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정규직 근로자들의 고용 보호를 줄이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를 위해선 입사 후 모든 근로자가 동등한 대우를 받되, 고용 시장의 유연성은 보장돼야 한다고 했다.

물론 모든 사회복지 정책에는 정부 지출이 요구된다. 그렇다 해도 현재 한국의 GDP 대비 조세 부담률은 선진국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2010년 한국 정부는 GDP의 25%를 세금으로 걷었다. OECD 국가들의 평균은 33%다. 세금을 올리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가 아니라고 해도 한국 정부는 재정적으로 여유로운 편이다. 경제성장을 저해하지 않는 수준에서 조세 부담률을 조정하는 것이 물론 쉽지는 않다. 하지만 한국은 이미 세계적 수준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나라다. 이제 세계적 수준의 근로 환경과 사회 안전망 또한 제대로 갖출 때다.



피터 M 벡 미 버클리대 졸업. 워싱턴 한·미경제 연구소 조사·학술 담당 실장, 국제위기감시기구(ICG) 동북아사무소 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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