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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길 모래 먼지가 들려주는 1천 년 전의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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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실크로드’는 로마인들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킨 단어였지만, 그 반대쪽 끝에 있는 우리에게도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긴 마찬가지였다.

최근에 나온 정찬주의 『돈황가는 길』(김영사)을 비롯해 김영현의 『서역의 달은 서쪽으로 흘러간다』(학고재), 박찬의 『우는 낙타의 푸른 눈썹을 보았는가』(해냄) 등은 작가의 입장에서 실크로드를 다녀온 기행문이며 김호동의 『황하에서 천산까지』(사계절)는 학자의 시각으로 회족·위구르족 등 실크로드 연변의 소수 민족사를 살펴본 기행문이다.

반면 윤후명의 『돈황의 사랑』(문학과지성사)은 실크로드가 우리에게 어떤 문학적 상징을 띄는지 보여주는 소설이다.

학문의 대상에서 이국 취향의 소재까지
이처럼 실크로드는 일본의 뉴에이지 음악가 기타로의 ‘실크로드’에서 흘러나오는 음률처럼 모래먼지에 휩싸인 대평원이라는 이미지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돈황, 미란, 타클라마칸, 우루무치 등의 지명은 그 이미지가 얼마나 이국적인지 보여준다. 현재 우리 출판물로 실크로드에 들어가는 기본적인 경로는 위의 기행문을 제외하자면 세 가지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의 하나인 장 피에르 드레주의 『실크로드-사막을 넘은 모험자들』(이은국 옮김, 시공사)이 실크로드의 역사, 그에 연루된 인물, 발굴과정을 총체적으로 담은 입문서의 역할을 한다면, 피터 홉커크의 『실크로드의 악마들』(김영종 옮김, 사계절)은 실크로드 문명사 발굴과정을 담은 흥미진진한 넌픽션이다. 이 둘을 섭렵했다면 최근 출간된 수잔 휫필드의 『실크로드 이야기』(김석희 옮김, 이산)로 들어갈 수 있다.

이 책은 실크로드 발굴사의 결과물로 재구성한 실크로드 문명 전성기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담았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책을 모두 읽고 나서도 실크로드의 신비함은 벗겨지지 않는다. 실크로드의 힘은 아마도 여기서 나오는 듯하다.

“여러 나라의 황제 폐하, 국왕 전하, 공작, 백작, 후작을 비롯한 각하, 그리고 기사, 부호님들과 모든 시민들이여, 별의별 수많은 인종으로 가득 찬 세계 각국의 다양한 모습들이 궁금하고, 또한 그들의 관례와 풍습을 알고 싶으시다면 이 책을 읽어보도록 하십시오.”

『실크로드 ― 사막을 넘은 모험자들』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이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책은 다른 디스커버리 총서와 마찬가지로 실크로드와 관련한 다양한 화보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책은 중국의 실크가 로마에 전해지던 기원전 1세기부터 실크로드의 역사를 다루기 시작하는데, 전반부에는 실크로드를 사이에 둔 서양과 동양이 서로를 얼마나 신비화시켰는지 보여준다. 실크로드를 다룬 다양한 책에서 인용한 글과 도판 자료는 이 책이 가진 장점이다.

하지만 이 장점에서 한계가 드러나기도 한다. 흔히 실크로드의 황금기는 당나라(618∼907) 때로 알려진다. 당나라는 외국인에게 관대해 당시의 수도였던 장안에는 투르크인, 이란인, 아랍인, 소그드인, 몽골인, 아르메니아인, 인도인, 한국인, 말레이인, 일본인 등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었고 거주하던 외국인만 해도 5천 명에 이를 정도였다.

서양인이 서술한 이 책은 이 부분을 “중국에서 843년과 845년 사이에 내려진 외국 종교 금지령은 이미 몇 세기 전에 건너와 널리 퍼져 있던 다른 종교에도 충격을 줬다” 정도로 간략하게 다룬다. 대신에 마르코 폴로, 마테오 리치 등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으로 들어간 서양인의 경로에 많은 초점을 맞춘다.

세계에서 몰려든 탐험가들이 발견한 놀라운 기록
『실크로드』의 뒷부분 ‘기록과 증언’에는 마르코 폴로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오렐 스타인, 폴 펠리오, 알베르트 폰 르 콕 등 1890년 이후 실크로드 탐사에 나섰던 고고학자들에 관한 기록이 간략하게 담겨 있다. 이 간략한 기록을 확대해서 볼 수 있는 책이 바로 『실크로드의 악마들』이다.

영국도서상 논픽션 부문을 수상한 이 책은 실크로드 문명사를 짧게 소개한 뒤에 사막에 파묻힌 실크로드 문명 발굴사로 들어간다. 소개한 세 가지 책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슬람 사기꾼 아훈의 얘기부터 시작한다. 서양인들에게 위조된 고문서를 팔았던 아훈의 행각은 오렐 스타인에 의해 드러난다. 아훈의 이 사기 행각은 19세기 실크로드 문명에 대한 서양인들의 열렬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타클라마칸의 모래바람에 매혹돼 사라진 도시를 찾겠다고 나서 결국 누란을 찾아낸 스웨덴의 스베 헤딘, ‘마르코 폴로 이래 가장 위대한 아시아 탐험가’란 소리를 들으며 돈황의 천불동에서 『금강경』을 발견해낸 영국의 오렐 스타인, 카라호자에서 마니교의 경전과 네스토리우스교의 벽화를 발굴해낸 독일의 알베르토 폰 르콕, 돈황에서 1만 5천 여부에 달하는 고문서를 찾아낸 폴 펠리오, 뒤늦게 실크로드로 뛰어든 미국의 랭던 워너, 결국 발굴품을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 안겨준 셈이 된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 등 실크로드 문명을 찾아내겠다고 나섰던 세계 각국의 탐험가들의 모험담이 이 책에 실렸다.

이들은 경쟁적인 발굴의 결과로 탈세자에 대한 처벌 기록, 9의 9배는 얼마냐와 같은 산수 문제를 푸는 아이들의 낙서, 피로 얼룩진 법의를 걸친 채 살해된 불교승의 바싹 마른 시체, 공양을 드리는 소그드 상인의 모습을 담은 벽화, 취객이 주인에게 보낸 사과편지 등을 발견했다. 이는 1천 여 년 전 실크로드 연변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물이었다.

이들 발굴 유적을 통해 전성기 실크로드 문명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한 책이 바로 수잔 휫필드의 『실크로드 이야기』다. 8세기와 10세기 사이 약 2백 50년 간 실크로드와 영욕을 함께 했던 상인, 병사, 목부, 공주, 승려, 기생 등 열 명의 삶을 재구성한 이 책은 철저한 고증을 통해 당시 생활상을 소설처럼 펼친 흥미로운 책이다.

‘프롤로그’에서 오렐 스타인, 폴 펠리오 등 실크로드 발굴사와 실크로드 전사를 소개한 뒤, 이 책에 소개된 인물들이 모두 돈황 문서나 지난 수십 년 사이에 발견한 자료에서 발굴해낸 사람들이라는 점을 밝힌다.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1천 여년 전 사람들의 모습
이 책에는 사마르칸트와 당나라 수도 장안을 오가며 장사하던 낭만적인 상인 나나이반다크,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 장군의 무용담을 후배 병사들에게 얘기해주는 티베트 병사 세그 라톤, 기생이 돼 군대를 따라 전전하다가 장안에서 생활하던 중 그만 황차오의 난에 휘말려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고향 쿠차로 돌아간 금발의 기생 라리슈카, 돈황 석굴을 장식하는 데 평생을 바친 화가 둥바오더 등이 등장한다.

이들의 삶을 뒤쫓은 글쓴이의 시선은 너무나 날카롭고도 따뜻하다. 당시 사람들의 기본적인 의식주는 물론이고 여성들의 머리모양, 신혼부부의 첫날밤 풍경, 결혼풍습, 사막에서 말과 낙타의 중요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세그 라톤 부분에서는 고선지의 활약상이 손에 잡힐 듯 눈에 들어온다. 실크로드 문명에 우리 역사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이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들을 읽으면 실크로드 문명사와 발굴사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다음에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김호동 옮김, 사계절), 약간 다른 내용이기는 하지만 야콥 단코나의 『빛의 도시』(오성환 옮김, 까치글방) 등 원전 자료와 장노엘 로베르의 『로마에서 중국까지』(조성애 옮김, 이산), 르네 그루세의 『유라시아 유목제국사』(김호동 옮김, 사계절), 조너선 D. 스펜스의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주원준 옮김, 이산) 등의 연구서를 읽을 수 있다.

물론 국제한국학회가 펴낸 『실크로드와 한국문화』(조합공동체 소나무)처럼 무거운 주제를 다룬 책에서 서갑숙의 실크로드 기행 누드화보집인 『뼈 연적 18』(영미디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실크로드 관련 국내서도 나와 있다. 누드집에서 본격 저술까지 다양하게 접근했다는 사실에서 실크로드가 학문의 대상이기도 하고 이국 취향의 좋은 소재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 잘 드러난다.(김연수/리브로)


■ 실크로드 이야기

■ 실크로드의 악마들

■ 실크로드

■ 동방견문록

■ 빛의 도시


■ 실크로드에 대한 자료를 집대성한 '실크로드 재단' 홈페이지

■ 실크로드의 악마들

■ 돈황학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국제돈황학프로젝트'

■ 실크로드 지역 지역, 돈황 천불동 벽화, 실크로드 관련 시 등을 볼 수 있는 'Silk Road to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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