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의 새로운 가능성, '더 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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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스크린에 나타난다. 옷이 찢겨있고 몸에는 핏자욱이 선명하게 묻어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약간 정신이 나간 모습의 이 소녀는 전화통을 붙잡고 구조를 요청한다. 장소를 묻는 상대방의 물음에 소녀는 답변 대신, 외마디 비명을 질러댄다. 영화 '더홀'의 인상적인 도입부다. 영화는 이후 리즈라는 이름의 소녀가 겪은 며칠 동안의 악몽같은 시간을 되살려낸다. 그런데 영화에서 보여지는 '장면'들은 그리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리즈는 때로 거짓말로 영화 속의 어른들, 나아가 영화를 보는 관객을 철저하게 속이려고 든다.

'더 홀'은 영국영화다. 최근 할리우드에선 공포영화가 여러 갈래로 '패로디'되면서 코미디 등의 장르들과 하나로 뒤섞이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무서운 영화' 등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사실 최근의 '스크림' 시리즈 같은 것도 공포영화로서 그리 섬뜩한 수준의 것은 아니었다. 기존의 공포영화라는 장르의 관습을 철저하게 답습하면서 장르적인 한계를 오히려 역이용해 관객을 교란하는 시리즈였다고 설명해도 좋을 것 같다. 그에 비해 '더 홀'은 스릴러 영화로서 정공법을 택하고 있다. 특정한 공간에 갇혀버린 젊은이들의 심리를 매우 예리하게 담아내고 있는 거다. 게다가 사건에 연루된 학생들의 진술이 서로 엇갈리면서 영화는 사건의 진실을 가린채 미스테리를 하나씩 풀어가는 식으로, 장르적인 재미를 배가하고 있다.

'더 홀'은 리즈라는 여학생이 집에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경찰은 그녀가 실종된 네명의 학생들 중 하나임을 알게 된다. 유일한 생존자다. 리즈는 의사 필리파와의 상담을 통해 지하 벙커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씩 회상한다. 그런데 필리파는 리즈의 진술에 거짓에 섞여있음을 눈치채게 된다. 리즈의 말에 따르면 이렇다. 마이크를 짝사랑하던 리즈는 친구에게 부탁해 은밀한 파티를 벌이게 된다. 지하 벙커에 숨은 채 리즈와 마이크, 그리고 다른 한쌍의 커플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며칠간의 외유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일행은 문이 굳게 잠겨 있으며 그들이 외부에 구조를 요청할 수단이란 전혀없음을 알게 된다. 이후 벙커안을 지옥으로 돌변한다.

'더 홀'은 폐소공포증을 강조하면서 닫힌 공간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사건들을 하나씩 파헤친다. 영화는 리즈의 시점에서 진실과 거짓을 섞으면서 진행된다. 리즈의 기억속에선 자신과 친구들이 모두 '선한' 사람들이었으며 모든 것은 우연한 사고였을 따름이다. 그런데 차츰 그녀의 기억이 변조된 것임이 드러난다. 사실 벙커안에 모인 리즈와 친구들은 마약과 섹스로 시간을 보냈으며 자신들이 억울하게 지하에 갇힌 상황이란 것을 알게된 이후 타인에 대한 증오와 욕설을 멈추지 않았으므로.

'더 홀'엔 광기어린 살인마가 등장하지도 않고, 악령이 나오지도 않지만 섬뜩한 느낌을 자아낸다. 단순히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에게 집착하기 때문에 타인의 목숨을 우습게 여기는 어느 청춘의 모습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성장드라마와 하나로 결합하면서 절묘하게도 극의 반전을 연속적으로 취해간다. 리즈는 살인마일까, 아니면 죄없는 희생양일까? 영화 속 인물의 시점에 따라 정황은 시시각각 달라진다. 결말에 가서야 닉 햄 감독은(그는 주로 연극무대와 TV 시리즈 연출자로 활동했었다) 리즈의 정체를 공개한다. 그런데 묘하게도 관객입장에선 그녀를 미워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은 그녀의 누군가를 향한 광기어린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어느 해외 언론에선 '더 홀'에 대해 "공포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 독특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평했다. 이 영화는 뛰어난 수작까지는 아니지만 영국영화에서 스릴러물의 오랜 전통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리즈역의 도라 버치의 연기는 기억할만하다. 그녀는 '아메리칸 뷰티'에서 부모를 우습게 여기는, 위협적인 청춘의 모습을 보여주더니 이번 영화에서도 쉽게 잊지 못할 매서운 눈매를 과시한다. '애증'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몇안되는 젊은 배우중 한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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