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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플랜 B’를 준비할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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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일러스트=강일구]
김종수
논설위원

이젠 안 되겠다. 더 이상 기대할 게 없어 보인다. 여야의 대선후보들이 주저앉는 경제를 일으켜 세우고, 좀 더 나은 일자리를 조금 더 만들어낼 확실한 비전을 보여줄 것이란 기대 말이다. 경제는 속절없이 가라앉기만 하고, 조만간 실업문제가 전면에 떠오를 것이 분명한데도 오직 대선의 정치공학에만 몰두하고 있는 여야 후보들에게 그런 문제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이대로 가면 누가 대통령이 되든 내년에 부닥칠 첫 번째 도전은 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만들기가 될 것이다. 지금은 정치 쇄신이니 경제 민주화니 해서 무언가 참신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듯이 외쳐대지만, 실제로 내년 2월에 취임하고 나면 달리 해볼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을 것이다. 국민의 일자리가 날아가고 생계가 막막하다는데 그보다 더 시급한 국정과제가 뭐가 있겠는가.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하기도 전에 외환위기를 수습하느라 무얼 해볼 틈도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도 취임하자마자 불거진 신용카드 대란을 막느라 약속했던 공약을 미뤄야 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취임 첫해에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 탓에 747공약을 접어야 했다. 최근 세 명의 대통령이 모두 취임 첫해에 자신의 포부를 펼칠 기회가 없었다. 더 다급한 현안부터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국민의 생계와 일자리보다 더 다급한 현안은 없다. 다음 대통령은 당장의 폭발력은 크지 않지만 수습하기는 더 어려운 저강도(低强度)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바로 장기 저성장이다. 나라가 단박에 결딴날 일은 아니지만 시름시름 기력을 잃어 어느 시점을 지나면 더 이상 일어설 가망이 없어지는 치명적인 중병이다. 눈 밝고 용기 있는 후보라면 우리나라가 이 병에 걸릴 위험이 크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국민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던질 것이다. 다가오는 고난을 예고하고 위기 극복에 동참할 것을 호소할 것이다. 그리하여 먼 장래에 더 번영하는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자고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런 후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모두 표심을 사기 위해 사탕발림의 아부성 공약만 남발할 뿐이다.

 대선후보들이 임박한 위기를 외면하는 이유는 아마 다음 두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 때문일 것이다. 우선 정치공학의 숫자놀음에 빠져 위기의 실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일단 정권을 차지하는 게 급한 판에 성장 잠재력이 가라앉는다는 한가한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위기라는 걸 알아챘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다. 당장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만들어낼 묘책도 없을뿐더러 장기적인 비전은 더더구나 막막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대안도 없는 판에 국민더러 고통을 감내하고 위기 극복에 동참하자는 얘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선후보들이 성장과 일자리에 대한 공약을 전혀 내놓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행계획은 없이 ‘원론적인 선언’과 ‘화려한 수사’에 그친 공약이 대부분이다. 무엇보다 현재의 경제상황과 앞으로 닥칠 위기에 대한 제대로 된 진단이 없다. 진단이 부실하니 온전한 처방이 나올 리 없다. 마지못해 성장과 일자리를 말하지만 진정성이 담기지 않은 구호는 공허하기 짝이 없다.

 이번 대선에서 위기를 극복하고 장래의 비전을 보여줄 위대한 지도자가 출현하리라고 기대했다면 그런 희망이 실현될 가망은 없어졌음을 인정하자. 이제는 ‘플랜 B’를 준비해야 할 때다. 당초의 기대(플랜 A)가 난망해졌으므로 차선의 대비책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대선후보나 정부가 위기 극복의 청사진을 내놓지 못하고 있으니 국민 각자가 살길을 찾아야 한다. 우선 어떤 대선후보가 대통령이 돼 무언가 내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란 기대부터 싹 지워야 한다.

 플랜 B의 첫 단계는 앞으로 닥칠 위기의 실상을 냉정하게 가늠하는 것이다. 경기침체가 장기화하면 소득이 줄고 일자리가 위협받는다. 다니던 직장에서 내몰릴 수도 있고, 새로운 일자리는 구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전제하에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 소득이 줄거나 끊긴 채 상당 기간 버틸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대선후보들이 내세우는 각종 복지공약은 믿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 공약대로 실천하려 해도 경기침체가 계속되면 재원을 마련할 길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떡하든 자력으로 어려운 시기를 견딜 방도를 찾아야 한다. 노후대책도 새로 짜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금리는 떨어지고 각종 투자상품의 수익률 또한 낮아질 공산이 크다. 저성장·저금리·저환율 시대에 각자가 적응해 나가야 한다.

 기업들은 벌써 ‘플랜 B’에 들어갔다. 내로라하는 간판 대기업과 금융회사마저 저성장·반기업 기조에 대비해 투자를 줄이고, 일부는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몸집을 줄여 장기전에 대비하겠다는 심산이다. 기업의 투자 감소는 소비 부진과 함께 내수 침체를 가속화할 우려가 크다. 자칫하면 경제규모 자체가 쪼그라드는 디플레이션을 부를 가능성도 있다. 이왕 ‘플랜 B’를 준비한다면 가급적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게 낫다. 어설픈 낙관보다는 비관적인 상황을 가정하는 게 생존 확률을 높이는 길이다. 이기는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