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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세상]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중앙일보

입력

윤후명씨의 소설집 『가장 멀리 있는 나』(문학과지성사.8천원) 와 중국 출신 작가 가오싱젠(高行健) 의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 소설 『영혼의 산』(이상해 옮김.현대문학북스.전2권.각권 8천8백원) 을 읽었습니다.

열대야도 잊은 채 두 소설 다 머리와 가슴을 열게 하는 지성과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면서 두 작품을 섬세하게 비교하고픈 욕심이 드는군요.

왜 중국 출신의 프랑스 망명 작가에게는 노벨문학상이 돌아가고 윤씨는 아직 서구 문단에 무명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고 싶습니다.

제가 읽기로는 역사나 현실이 아니라 자신과 문명의 원초를 찾는 여행의 소재나 주제, 작가의 신화적 상상력이 흡사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작품의 완성도 내지 수준에서 두 작품의 우열을 가리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래 좀 더 두 작품을 꼼꼼히 읽어내 두 작품의 차이를 밝히고 또 번역이나 '로비' 등 문학 외적인 것도 살펴 우리도 노벨문학상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살피고 싶습니다.

아! 그러나 저는 그런 '한가한' 욕심을 접을 수밖에 없습니다.

언론사 세무조사로 더욱 가팔라진 대치 정국이 일파만파 번지며 한국문학을 다시 정치적.투쟁적 국면으로 불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 급기야 진보적 문학단체인 민족문학작가회의가 국민의 정부 들어서는 처음이랄 수 있는 '성명' 을 25일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간 언론사 세무조사를 둘러싼 일련의 공방을 주시하면서도 되도록 말을 아껴왔다는 민족문학작가회의는 문제의 언론사들이 자신의 과오와 오류에 대해 겸허하게 사과하고, 법의 심판을 수용하겠다는 자세를 보여주라고 요구했습니다.

아울러 정부도 세무조사를 빌미로 권력의 입맛에 따라 언론을 순치하고자 한다는 항간의 의혹과 주장에 대해 정정당당한지에 대해서도 거론했습니다.

과거 신군부 독재에 대항하며 하루가 멀다하고 내놓던 투쟁적.구호적 성명과 달리 이번의 성명은 그 언어가 많이 순화되어 있습니다. 특히 "문학과 언론이 오랫동안 맺어온 애증의 깊은 관계도 역시 우리를 신중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다" 고 성명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문학과 언론이 맺어온 '애증(愛憎) 의 깊은 관계' .그러했습니다. 민주화된 시절에 활동했으면 속 깊은 순수서정시 세계를 일궜을 시적 자질이 시대에 저항하는 구호로 쓰였습니다. 그런 문학에 신문은 과감하게 지면을 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야(在野) 니 뭐니 해도 적어도 독재시절 문학만큼은 진보주의 쪽의 참여.저항문학이 '재여(在與) 문학' 이었습니다. 민주화를 향한 사회적 열망과 명분이 문학보다 앞서야 했기에 안타깝지만 순수문학에는 지면을 그만큼 내줄 수 없었습니다.

이번 성명에서는 그런 애증의 관계에서 우러나오는 고뇌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과거 독재 시절 역사적 당위이고 정의라는 '명분' 이 앞섰던 성명이 이제 중층적으로 어느 집단.세력을 향한 '현실적' 압력으로 작용한다는 데 대한 인간적 고뇌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문학성과 사회성 사이의 '선택적 고뇌' 에서 자유로워져 우리 문인들이 그 통합적 고뇌의 속 깊은 문학으로만 나아갈 수 있는 좋은 시절이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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