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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동양평화론과 그랜드코리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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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정진홍
논설위원

# 103년 전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쐈다. 그 후 그는 뤼순 감옥에 수감돼 일제의 일방적이고 형식적인 재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국권회복과 동양평화를 위한 의로운 전쟁을 수행한 전쟁포로이기에 만국공법이 아닌 일본제국법정에서 재판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천명한 후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며 항소마저 포기한 채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이 1910년 3월 15일께다. 안 장군은 당초 서(序), 전감(前鑑), 현상(現狀), 복선(伏線), 문답(問答)의 5편을 저술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일제가 서둘러 그해 3월 26일 사형을 집행하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았다.

 # 비록 ‘서’와 ‘전감’의 일부만을 쓰는 것에 그친 미완이지만 『동양평화론』과 공판기록 등을 통해 안중근 장군이 생각했던 동양평화의 구상이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 안에는 놀라운 혜안이 담겼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동양평화회의 개최, 한·중·일 동북아 3국 공동은행의 설립과 공용화폐 발행, 뤼순 등 지역 개방과 공동관리 및 동양 3국의 공동군단 편성 등이다. 오늘의 유럽연합(EU)과 같은 동아시아공동체를 100년 전에 그려낸 그의 혜안이 놀랍지 않은가!

 # 작금의 한·중·일은 크고 작은 긴장과 다툼 속에 있다. 하지만 역사의 큰 눈으로 보면 결국 평화와 공존의 흐름을 타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서로에게 이익임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미래에 나타날 동북아연합 내지 블록에서 한국이 분명하게 살아남고 주도적 위치에 서려면 향후 50년, 아니 100년을 내다보며 무엇보다도 한글을 읽고 쓰는 1억 공동체를 창출해야만 한다. ‘1억 한글공동체’야말로 미래의 동북아 블록화에 대비하는 가장 현실적인 생존과 대처방안이다. 현재 남한 인구는 5000만 명을 넘어섰지만 북한 인구는 아직 2500만 명을 넘지 못했다. 여기에 해외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모두 포함해도 8000만 명 안팎이다. 하지만 이것을 1억 명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미래의 우리가 존립할 근거다. 1억 명 규모의 공동체적 내수시장을 확보해 놓고 있어야 블록화된 세계에서도 미래의 생존이 가능하다. EU 내에서 아무리 뒤섞여도 각자의 언어와 문화가 살아있기에 여전히 프랑스요, 독일이요, 이탈리아 아닌가. 마찬가지로 미래의 동북아연합 내지 블록에서 우리가 당당히 우리로 존재하려면 ‘1억 한글공동체’가 핵심이다. 그것이 다름아닌 ‘그랜드 코리아’의 실존이고 요체다.

 #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 지성으로 꼽히는 올해 여든일곱 살의 정의채 몬시뇰 신부가 『인류공통문화 지각변동 속의 한국』이란 책을 펴냈다. 그는 이 책에서 세 번째 밀레니엄, 즉 2000년대에는 동양, 그중에서도 한국이 선도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듯 썼다. 가장 빈곤했던 식민지에서, 그리고 전쟁으로 초토화된 나라에서 당당한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한국의 역할이 주목받을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이 감당해야 할 과제를 ‘따뜻한 자본주의’와 ‘행복한 발전’이란 용어로 압축했다. 깊이 공감한다.

 # 바야흐로 시세(時勢)가 동양(東洋)이다. 한·중·일 3국의 위력과 위세는 경제는 물론 정치·군사·문화 면에서도 EU에 비할 바가 아니고 미국과 러시아마저 넘어선다. 중국은 미국과 자웅을 겨룰 듯한 기세로 나서고 있고 일본 역시 침체됐다고는 하나 그 저력을 무시 못한다. 한국은 지난 60여 년간 바닥치고 일어서 괄목할 만큼 커졌다. 다만 이 변화하는 지형 위에서 어디로, 어떻게 향할지가 문제다. 그 해답의 단초가 놀랍게도 안중근 장군의 100여 년 전 ‘동양평화론’ 안에 있음을 감히 말하고 싶다. 박근혜·문재인·안철수 3인은 짬을 내 『동양평화론』과 공판기록 등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비록 5년 임기지만 향후 50년, 아니 100년을 내다보는 그랜드비전을 마음에 심고 그려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진짜 리더다.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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