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미국TV 겹치기는 거의 안한다

중앙일보

입력

'전파견문록' (MBC) 은 투명한 어린이의 눈으로 세속에 찌든 어른들의 삶을 훑어보게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는 사심이나 계산 없이 자신의 앵글에 잡힌 세상의 구겨진 모습을 말한다. 미국에도 빌 코스비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그 비슷한 것이 있었다.

미국의 TV(전파) 를 견문하며 결국 돌아보는 건 내 나라 한국의 TV다. '안방극장' 이라는 비교적 고상한 애칭에서 규모나 대우면에서 형편없는 처지인 '바보상자' 로 추락한 것은 세 가지 고질적 병폐 때문이다. 그 질환의 이름은 바로 베끼기, 벗기기, 그리고 겹치기다.

베끼기는 미국에서도 성행한다. 미국 시청률 상위에 랭크된 'Who Wants to Be a Millionnaire' 나 'Weakest Link' 등도 실은 다 '베낀' 프로그램들이다.

다만 그들은 솔직하게 그 말미에 어디서 빌려온 포맷이라고 밝힌다. 둘 다 영국 BBC가 출전이다. 아이디어는 곧 돈이므로 저작권료도 당연히 지불한다. 비난의 여지가 없다.

한국은 빌려오긴 하면서 그 경위를 은근슬쩍 묻어둔다. 물론 돈도 지불하지 않는다(그래서 훔쳤다는 얘기까지 듣는다) .

창의력 경쟁보다는 누가 먼저 재미있는 내용이나 형식을 베끼느냐에 더 신경을 쏟는 형국이다. 마땅히 고쳐야 할 점이다.

벗기기로 말하면 미국은 한국에 비교가 안 된다. 드라마보다 코미디나 토크쇼가 더 벗기는데 차이점은 인간의 속옷을 벗기기보다는 그 속내, 즉 이중성을 벗기는 데 치중한다는 점이다. 인간 내면의 치부를 민망한 수위까지 벗기는데 시청자도 이력이 난 모양이다.

심야토크쇼를 진행하는 데이빗 레터맨이나 제이 레노의 주된 메뉴는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이다. 방청객과 함께 시종일관 대통령의 언행에 대해 '씹어' 대는데 전혀 망설이는 기색이 없다. 권력은 낱낱이 벗겨야 제 맛이 난다는 게 그들의 TV문화인 듯싶다.

한국에선 걸핏하면 선정성 시비가 일어나는데 아직은 점잖은 게 덜 불편한 시청자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한국의 시사코미디는 좀더 과감하고 도전적이어야 한다. 지금은 그냥 뒤흔드는 게 고작이다. 풍자와 해학은 겉돌고 야유와 조롱은 넘친다. 촌철살인의 기지가 아쉽다.

겹치기는 연예인이나 시청자, 제작진에게 두루 피곤한 현상이다. 그 넓은 미국에서 일주일에 너댓 개의 프로에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는 연예인은 찾기 어렵다.

꼭 그 사람이 필요하면 그의 가치에 상응하는 몸값을 지불한다. 그가 먹고살기 위해 여기저기 얼굴을 내미는 궁상을 떨 필요가 없는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