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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해서…" 실종 된 아내가 경찰에 답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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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난 20일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는 원모씨가 박모씨의 시체를 유기한 경기도 양주시 소재 야산에서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사진 성동경찰서]

지난달 15일 오전 서울 성동경찰서 별관 1층 실종팀. 40대 남성이 문을 두드렸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아내가 사라졌습니다. 어제 저녁부터 연락이 안 됩니다.”

 20년 차 베테랑 형사 고이석(39) 경사가 실종 접수를 했다. 남편 정모(40)씨는 아내 박모(34)씨의 실종 경위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시종 차분한 목소리였다.

 “아내가 실종됐는데 저렇게 침착할 수 있을까. 가족이 사라지면 횡설수설하면서 경찰에게 매달리는 게 일반적인데….”

 고 경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정씨를 안심시킨 뒤 돌려보냈다. 그 다음 실종된 아내 박씨의 휴대전화로 수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경찰이니 연락 바란다’는 문자를 보내자 회신이 왔다. ‘임신을 했습니다. 정리되는 대로 돌아가겠습니다.’

 

 실종자가 곧바로 문자메시지를 보내오는 건 드문 일이었다. 경찰은 실종자를 추적하는 동시에 남편의 행적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조사 결과 아내 박씨는 남편 정씨에게 1년 전부터 이혼을 요구하고 있었다. 성격 차이 등으로 인한 불화 때문이었다. 아내는 남편에게 주기로 한 위자료 6억원 가운데 4억원을 이미 건넨 상태였다. 남편은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매출이 형편없었다. 그러나 부인이 4년 전 남편으로부터 사업권을 넘겨받은 렌터카 업체는 한 달 수익이 2억원에 이를 정도로 ‘대박’이 터졌다. 박씨의 어머니도 “딸아이가 가출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지난달 23~24일 결정적인 단서가 잡혔다. 서울 강남과 경기도 수원 일대 네일숍과 선글라스 가게, 커피점, 옷가게 등에서 실종된 부인의 체크카드로 270만원이 결제된 것이다. 해당 업소는 모두 CCTV가 없는 곳이었다. 경찰은 CCTV가 없는 곳에서만 체크카드가 사용된 것에 의심을 품었다. 해당 업소 주변의 도로에 설치된 CCTV를 분석한 결과 반복해서 나타나는 30대 남성이 포착됐다.

 경찰은 3주에 걸친 잠복 끝에 지난 14일 이 남성을 붙잡았다. 수원에서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는 원모(30)씨였다. 원씨는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아내의 실종은 남편에 의한 청부살인 사건으로 드러났다. 박씨 명의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낸 것도 체크카드를 사용한 것도 모두 원씨였다.

남편 정씨는 ▶부인 명의 휴대전화로 장모, 친구 등에게 문자를 보내고 ▶원씨에게 부인의 체크카드를 사용하도록 해 마치 박씨가 살아있는 것처럼 치밀한 알리바이를 짠 것이었다. 하지만 원씨가 붙잡히자 남편도 16일 경찰에서 범행을 털어놨다. 부인 박씨의 시신은 이틀 뒤 경기도 양주의 한 야산에서 발견됐다.

 경찰에 따르면 정씨는 지난 5월 21일 서울 강남구 주점에서 원씨를 만나 아내를 살해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대가로 1억9000만원을 주기로 약속했고 1억3000만원은 원씨에게 실제 건네졌다. 원씨는 9월 14일 오후 4시쯤 박씨를 납치해 서울 성동구 인근 오피스텔 지하주차장에서 목을 졸라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했다. 정씨는 경찰에서 “이혼을 하면 아들·딸까지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될 것을 우려해 범행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서울 성동경찰서는 정씨를 살인교사 혐의로, 원씨를 납치·살해 및 시체 유기 혐의로 구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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