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스페이스와 자유의 곤경 [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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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他者, 윤리

자유의 증대가 자유 자체를 파괴할 가능성 ― 그것이야말로 사이버스페이스가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문제 자체는 결코 새롭지 않다. 방종, 남용은 자유와 더불어 존재해왔던 용어들이다. 지금 새로운 것은 문제의 형태 내지는 속도다. 자유를 증폭시키는 편리하고도 용도많은 기술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기술의 효용을 도외시할 수 없기에 그 기술이 더불어 內藏내장하는 방종의 자유라는 문제가 시급한 것으로 등장한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자유로운 개체들은 무엇을 찾아다니는가? 그들은 통상 특별한 호기심, 특별한 기호를 긍정해줄 장소를 찾을 뿐이다.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광대한 세계, 막힘 없는 세계를 통하여 그들은 현실세계에서라면 차마 입에도 올리기 힘들었을 취향, 그 폭력적이며 비인간적인 취향을 긍정해줄 동지를 찾을 수 있다. 혹 누구라도 그들을 비난한다면, 아무런 자기절제없이 그를 최고의 폭력으로 응징하려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사이버스페이스가 구조적으로 조장하는 것이다. 구조적으로 증폭된 자유, 그 성숙에 필수적인 계기 없이 무작정 확장되어버린 자유의 곤경이 상황의 본질이라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이야기를 조금 진전시켜보자. 자유를 성숙시켜주는 것, 그것의 철학적 이름은 무엇일까? 교육이나 훈육이라는 것들의 〈철학적 이름〉은 무엇인가? 이와 관련하여 나는 〈他者〉라는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의 개념을 떠올린다. 존재론적 의미로서의 타자란 나와의 차이에 의해 정의되는 존재를 말한다. 나와 다른 것이며, 엄연히 존재함으로써 나를 제약하는 것이다. 왜 그것이 자유를 성숙시켜주는가? 모든 것이 나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에서 나의 자유란 무엇인가? 그저 본능일 뿐이다. 본능적 충동과 전혀 구분될 수 없다. 그 세계에서 나는 욕망에 따라 말하고 행위하면 충분하다. 거기서 자유는 성숙할 필요도 없고 굳이 자유라고 불릴 필요도 없다. 그 세계는 타자가 없는 세계다. 모든 것이 나의 의지, 나의 행위와 일치되게끔 조절된 인형들의 세상이다.

그렇다면 언제 자유를 의미 있게 이야기하게 될까? 그건 타자가 등장하면서이다. 나 아닌 것, 그러나 나와 동등한 존재의 권리를 가진 것이 나타남으로써 나의 행위가 본질적으로 제약받을 때, 그때 나는 나를 어떤 방식으로 규제할 것인가를 숙고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의 자유는 그런 숙고를 통해서 성숙한다.

오늘날 사이버스페이스가 처한 곤경은 어떤 것인가? 앞서 말했던 침식, 즉 상업주의와 권력으로부터의 침식과 더불어, 쓰레기 정보, 아동 포르노와 같은 비정상적인 취향, 유동적이며 취약한 공동체들 같은 것이 가장 뚜렷한 문제로 등장한다. 도대체 왜 그런 것들이 드러나는가? 이제 우리의 설명을 줄 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타자가 지워진 자유의 효과이다. 타자가 지워진 자유는 스스로 고양될 수 없다. 왜 달라져야 하는가? 왜 절제해야 하는가? 왜 생각해야 하는가? 이 모든 물음을 공허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나의 자유는 극대화된다. 그 안의 모든 것들이 나의 클릭 한번에 사라지고 지워진다. 모든 것이 나의 의지 앞에서 복종할 때,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의 차이란 무의미한, 아무런 윤리적 의미도 갖지 못하는 구별일 뿐이다. 나를 제약하지 못하는 타자는 말 그대로 환상의 존재일 뿐이다. 거기서는 윤리가 필요치 않다. 나의 자유, 지적이며 신중하고 배려하는 자유가 성숙할 이유가 없다. 타자라는 계기를 상실한 그 곳은 윤리의 가능조건이 삭제된 공간이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공간일 수 없다.

교훈

사이버스페이스는 지금 급속히 확장되고 있다. 이메일과 인터넷의 흔한 경험을 기반으로 삼아 사회의 모든 국면으로 침투해가고 있다. 사회의 모든 계층을 불러모을 만한 다양한 컨텐츠들로 채워지고 있으며, 웹페이지와 이메일을 넘어서 모든 미디어의 대통합을 진행시키고 있다. 또한 거의 모든 사회현상과 결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교육, 오락, 친교, 사업, 사적 생활 등, 우리의 모든 삶 속으로 사이버스페이스가 들어와 있다.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국면이 구조적으로 변형되고 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사이버스페이스의 이러한 팽창을 염려한다. 그것이 우리 문명에 결코 유익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의 분석도 그에 동의한다. 사이버스페이스는 본성상 無道德의 공간이기 쉽다는 결론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비관이 아니다. 오직 악몽만이 가능하다거나 미리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는 식의 의견이 아니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위험만큼이나 잠재적 이득이 적지 않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그것을 수용하고 발전시키는 방식이다.

그 첫 번째 단계는 위험의 깊이를 인식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이버스페이스를 염려하는 많은 사유들은 더 많은 정보, 더욱 편리한 의사소통, 더 많은 자유 ― 그런 것들이 순조롭게 구현될 수 있는가의 문제 주위를 맴돌고 있다. 거기서 정보기기의 보급, 통신언어라는 제약, 상업적-국가적 제약 등이 중요한 문제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의 끝이 아니다. 그런 물음의 형식에서는 간파되지 않는 중요한 사항이 있다. 더 많은 정보, 더욱 편리한 의사소통, 더 많은 자유는 과연 좋은 것인가? 그것은 왜 좋으며, 어떤 형태로서 좋게 기능하는가? "더 많은…"이라는 접두사는 과연 마냥 타당한가?

우리가 분석해 본 자유의 개념으로 볼 때 분명 〈더 많은 자유〉가 말 그대로 자유를 성장시켜주는 것은 아님이 밝혀졌다. 사이버스페이스의 자유는 자기파괴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이 드러났다. 더 편리하고 저렴한 미디어라는 장점, 엄청나게 많은 정보, 외부의 제약을 무력화시키는 자유 ― 이것들은 모두 좋은 사회를 위한 의미있는 자원일 수 있다. 그러나 그자체로 좋은 사회를 위한 충분한 조건은 못된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좋은 사회는 자유의 성숙 또는 성숙된 자유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자유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타자, 그것들과의 遭遇조우가 절대 필요하다. 타자와 조우하지 못하는 관점과 자유는 미성숙 아니면 폭력일 뿐이다. 사이버스페이스가 질주하는 파편적 개인주의를 제어하기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는 구조적으로 타자의 계기를 지워낸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글의 논변이 타당하다면, 사이버스페이스 혹은 가상세계의 확장에 직면하여 우리는 더욱 현실이라는 계기를 강화해야 한다. 여기서 현실의 철학적 의미는 타자의 그것이다. 울퉁불퉁하고 먼지 나는 현실이 여전히 가치를 갖는다면, 그것은 정신의 엄연한 타자이기 때문이다. 타자를 겪고 성숙하는 정신만이 인간적 의미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며, 타자와 공존할 수 있다. 타자, 낯선 것과 조우하고 견디며 그것에 대해 배워 가는 공간의 구조를 상실한다면, 우리는 광란의 무질서, 反문명 속으로 소멸해갈 것이다. 사람들이 섞이며 부딪히고, 그 과정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성장 내지는 교육의 과정을 더욱 內實있게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사이버스페이스는 현실과 더불어만, 현실로 대표되는 타자라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윤리학적 계기를 상실치 않음으로써만 인간의 공간일 수 있고 약속의 공간일 수 있다.

오래 전에 나는 사이버스페이스가 현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때 그 의미는 그리 선명치 않았다. 지금은 훨씬 분명해졌다. 그 모호한 예감의 글귀로 우리의 논의를 마무리하고 싶다.

사이버스페이스는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人工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겪어왔던 진짜 현실의 본래 자리에 대해 생각할 것을 요구하는 듯하다. 우리의 논의에서 드러나듯 사이버스페이스의 난맥상은 자연, 육체, 유한성의 문제와 연루되어 있다. 항상 구속으로만 여겨져 왔던 그것들이 사라질 때, 우리에게 닥쳐올 것을 보여주는 극장으로서 사이버스페이스의 문제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서양의 知性史에서 자연, 물질, 육체는 항상 어떤 제한으로 여겨져 왔다. 그것은 우리를 어디에 못가게 하는 것이며, 더 머무를 수 없게 하는 것이고, 황급히 떠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를 겁에 질리게 하고, 아프게 하는 것이며, 그래서 정신의 위대한 힘으로 극복해야 할 어떤 것이었다. 이제 그것은 지극히 일면적인 이해임을 알 수 있다. 사이버스페이스가 그 낙관의 약속과는 달리 악몽의 공간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물질, 육체, 자연이 지워졌기 때문이었다. 사이버스페이스는 ''현실''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기를 요청한다. ''제약''으로서의 물질과 현실이 갖는 긍정적 의미를 철학적 주제로 登載시키고 있다. 타인의 시선에 포위되고, 벌레에 물리고 병들고 신음하던 유한성의 표식들이 우리의 인간성과 얼마나 깊은 연관을 갖는지를 새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봉재 / 서울산업대 인문자연학과 교수
자료제공 : emerge새천년(http://emerge.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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