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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영화낚시] '타인의 취향'

중앙일보

입력

순수예술의 역사는, 알고보면 후원의 역사다. 별로 돈 안되는 예술 나부랭이를 하는 데에는 돈 많은 예술애호가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왕조시대에는 왕이나 귀족이 '봉' 의 역할을 자임했다. 피렌체의 메디치가나 프랑스의 루이 왕가는 유명한 봉이었다. 교황의 지갑이 두툼하지 않았다면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에는 미켈란젤로의 손길이 닿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들이 손해만 본 건 아니다. 이들, 예술을 사랑하는 왕과 귀족들은 작품을 구입하는 데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했지만 대신 예술애호가라는 우아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정치권력 특유의 피비린내를 슬쩍 희석해주는 효과는 덤이었다.

음악이나 문학도 그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저술가들은 '헌정' 이라는 편리한 제도를 발명해 후원자들을 기렸다. 레코드 산업이 없던 시절 모차르트의 처지도 마찬가지였다. 귀족의 자녀들을 가르치거나 그들의 밥상머리에서 연주하는 건 무시할 수 없는 밥줄이었다.

그렇지만 세월이 흘러 왕과 귀족은 하나둘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하거나 국외로 추방되면서 권좌에서 밀려났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부르주아들이었다.

아무리 검약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이들이지만 등따시고 배부르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음악회와 전시회를 조직하고 극장과 미술관을 세웠다.

무엇보다 부르주아들은 대학을 통해 '예술 진흥' 에 기여했다. 오늘 날, 순수음악과 순수미술, 순수문학의 최고의 후원자는 누가 뭐래도 대학이다.

대학이야말로 안 팔리는 예술에 종사하는 화가와 음악가와 작가의 소중한 밥줄이다. 그걸로도 모자라 부르주아들은 각종 재단을 설립해 가난한 예술가들의 뒷바라지에 헌신 또 헌신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르주아와 예술가들은 행복하게 공생하고 있을까□ 그러니까 예술가들이 예술을 애호하는 이 부유한 부르주아들에게 깊은 감사의 염을 품고 밥 한 술 뜰 때마다 '잘 먹겠습니다' 를 외치고 있을까? 천만에. 예술가들은 오만한 미인과도 같아서 자신의 테라스에서 세레나데를 불러대는 부르주아를 경멸하는 것으로 낙을 삼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역설은 부르주아 역시 일종의 마조히스트여서 자신을 경멸하는 예술가를 더 좋아한다는 데 있다. 오히려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에게 아부하는 예술가에게는 아무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부르주아와 예술가가 벌이는 이 애증의 드라마는 영화 '타인의 취향' 에서 유쾌하게 전복된다. 부르주아는 속물이고 예술가는 진실하다는 고정관념은 의심을 받는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이 시대의 '봉' , 부르주아에 대한 위안잔치다. 그러니까 무식하다고 주눅들지 말라는 말씀. 오히려 개폼 잡는 예술가들, 혹은 예술애호가들의 내면에도 속물근성들이 득실대고 있다는 말씀. 이런 말씀마저도 예술가들의 입을 통해 들어야한다는 것. 그게 바로 부르주아와 예술가들의 '불평등 계약'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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