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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밥 신세 된 은퇴남 역할…저도 그런 친구들 있어요”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대한민국에서 송승환(55·사진)을 모르는 이가 얼마나 될까. 1965년 데뷔한 이래 48년째 대중 앞에 서 있는 그를 말이다. 하지만 최근 10여 년 사이 이름 앞에 붙는 타이틀은 꽤 달라졌다. 배우보다 사업가 혹은 공연기획자(PCM프로덕션 대표)라는 수식어가 더 앞선다.

97년 제작한 넌버벌 퍼포먼스 ‘난타’가 국내외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다. 그리고 이내 교수님(성신여대 융합문화예술대학장)이 됐고, 한국뮤지컬협회 이사장이라는 감투도 썼다. 한때 문화체육부 장관직 제안까지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천직은 ‘배우’라고 못박았다. TV가 됐든, 연극무대가 됐든 1년에 한 편은 꼭 출연하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2010년엔 연극 ‘에쿠우스’로 무대에 올랐고, 지난해엔 연극 ‘갈매기’에 이어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에 감초 역으로 출연했다.

올해 역시 약속을 지켰다. 27일부터 종합편성채널 JTBC에서 방영되는 드라마 ‘무자식 상팔자’에 출연한다. 이 드라마는 흥행 보증수표인 김수현 작가가, 그의 주특기인 대가족 이야기를 그린다는 점에서 이미 화제다.

70대 부부(이순재·강부자)와 그들의 세 아들 부부(유동근·김해숙, 송승환·임예진, 윤다훈·견미리) 그리고 3세들이 빚어내는 다양한 에피소드로 전개된다. 그는 둘째 아들 역을 맡았다. 1인 3역의 바쁜 일정에도 “김수현 드라마라 놓치고 싶지 않았다”는 그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봤다.

토씨 하나라도 틀리면 작가의 불호령

송씨는 김 작가 작품에 여러 번 출연했다. 80년대 일일연속극인 ‘사랑합시다’ ‘다녀왔습니다’부터 ‘목욕탕집 남자들(1996)’, ‘내 사랑 누굴까(2002)’까지다. 그중에서도 ‘목욕탕집 남자들’은 ‘무자식 상팔자’와 같은 대가족 구도였다.

보통 배우라면 비슷한 작품이라 꺼릴 법도 한데 그는 달랐다. “홈 드라마의 매력이 따로 있어요. 일상의 얘기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미니시리즈처럼 황당무계하고 스케일이 큰 사건이 꼭 일어나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서 온 가족이 보는 TV와 가장 잘 맞는 장르가 아닌가 싶기도 해요.”

무자식 상팔자에서 임예진과 부부로 나오는 송 대표. 퇴직 가장이 겪는 일상을 그려낸다. [사진=J TBC]

드라마는 큰아들 부부(유동근·김해숙 분)의 장녀이자 판사인 소영(엄지원 분)이 전 애인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가족들에게 들키면서 전개된다. 작가는 전작에서 ‘엄마의 휴업’ ‘동성애’ 등 사회 이슈를 드라마에 녹인 데 이어 이번엔 ‘미혼모’ 문제를 전면에 배치했다. 성·결혼에 대한 세대 간 관점이 다른 요즘 세태를 풀어낸 것. 충격적이지만 어느 집에서나 있을 법한 소재다.

그가 맡은 배역 역시 ‘일상에서 볼 법한’ 인물이다. 대기업 이사로 있다가 정년 퇴직한 50대 가장이다. 가정에 대한 모든 결정권과 경제권까지 아내한테 빼앗기고 힘들어한다. 그는 역할에 대한 이해를 이렇게 끝냈다.

“오랫동안 직장에만 매달렸다가 갑자기 집에 들어앉다 보면 그렇지 않겠어요. 적응기간이 필요한데 아내나 아이는 기다려주지 않고 오히려 찬밥 대접을 하죠. 우리 시대 가장 전형적인 가장 역할이라고 보면 되고, 또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사회문제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러면서 맏이나 막내 역할보다 둘째가 더 끌린다고 했다. 나이가 극 중 배역과 비슷하다 보니 실제로 친구들 중에 퇴직하고 등산 다니면서 소일하는 경우도 꽤 있어서다. “그들의 아픔을 내가 좀 알거든요.”

그리고 우연이지만 드라마 제목처럼, 그는 자녀가 없다. 정말 ‘상팔자’가 맞느냐고 물었더니 “모든 부모들이 자식 속 썩일 때는 ‘무자식 상팔자’라 하다가도, 뿌듯하게 해주면 또 ‘유자식 상팔자’라 하는 것 아니겠냐”며 웃음으로 넘겼다.

그러면서 배역과 달리 아내와는 신혼 때부터 지금껏 자타공인 ‘잉꼬부부’로 산다고 했다. 실제로도 그가 해외 출장 때마다 아내를 늘 데리고 가는 애처가라는 사실은 웬만한 이들에겐 모두 알려져 있다.

드라마 촬영은 금·토·일 주말에 몰려 있다. 회사와 학교를 오가는 사정을 제작진이 배려해준 덕분이다. 그만큼 처음 캐스팅 제안이 왔을 때부터 물리적으로 소화하기 벅찬 일정이라는 걸 알았다. 이쯤에서 궁금했다. 도대체 김수현이라는 작가에게 그토록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뭘까.

“선생님은 캐릭터를 만들고 나면 그 캐릭터와 배우의 공통점을 찾아내세요. 그리고 거기에 맞는 대사를 쓰시죠. 어차피 배우가 100% 다 자기를 버릴 순 없지 않나요. 그걸 감안하는 거죠. 본래 내가 무던하다가도 갑자기 좀 예민하게 굴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극 중) 둘째가 꼭 그래요. 그걸 캐치한다는 게 정말 탁월한 재능이죠.”

작가에 대한 무한한 신뢰 덕에 그는 연기 48년차에도 작가의 ‘대사 지도’를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토씨 하나, 지문 하나 틀려선 안 되는 철칙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대본 그대로 하지 않으면 ‘맛이 나지 않는다’라는 걸 알아요. 시청자는 몰라도 발성의 높낮이·강약 하나도 계산된 것이니까요.”

대본 연습에선 중견 배우라도 그게 하나라도 틀리면 바로 지적이 들어온다.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내가 그래서가 아니라 그러니까라고 쓴 이유가 분명 있다’고.” 그런 작가이기 때문에 방영 2주 전임에도 12회까지 대본이 나와 있다고 귀띔했다. “선생님에게 쪽대본은 없어요. 치밀하게 계산해서 쓰려면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 말은 곧 ‘김수현 사단’이 생기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대사의 맛을 어떻게 내야 할지 아는 사람들이 김 작가와 다시 만난다는 것. 덕분에 이번 작품도 익숙한 얼굴들과 함께한다. “목욕탕집 남자들에 나왔던 이순재·윤다훈씨와 다시 호흡을 맞추고 있으니 긴장할 일이 별로 없어요. 참, 아내 역의 임예진씨는 알고 지낸 지가 이미 40년이 넘었거든요. 우리 마누라보다 더 먼저 알았으니 눈빛만 봐도 이미 뭐 생각하는지 알죠.” 그는 NG도 잘 안 나니까 벌써 8회 촬영이 끝났다며 자랑스레 말했다.

히트작 ‘난타’ 이을 히든 카드는 ‘웨딩’

배우로서 만났지만 인터뷰 다음 스케줄은 ‘공연 기획자’의 일정이었다. 그만큼 그에게서 ‘뮤지컬’, ‘난타’라는 키워드는 강력했다. 사물놀이의 리듬을 모티브로 주방 도구들을 악기 삼아 벌이는 넌버벌 퍼포먼스 ‘난타’는 그가 공연계에 입지를 다지는 데 발판을 만들어줬다. 96년 5명으로 시작한 회사는 직원 수가 100명 이상으로 늘었고, 연매출도 500억원에 이른다.

‘난타’는 국내 공연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지금껏 2만4000여 회 공연, 777만 관람객 돌파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서울 강남(청담)·정동·명동 3곳과 제주 등 전용관만 네 곳에 공연 팀도 9개로 늘었다. 한국에 오는 관광객 1000만 명 중 110만 명이 공연을 보는데, 이 중 70만 명이 난타를 보기 때문이다.

초창기엔 지금처럼 유튜브나 트위터도 없던 시절이라 오프라인 마케팅에 열을 올렸다. “관람객들이 돌아가 입소문을 내기도 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죠. 때밀이 관광이 한국을 대표하던 시절에 관광책자와 상품에 난타 공연 관람을 넣으려 기를 썼어요.”

특히 해외 진출은 대단한 성과였다. 99년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세계 무대에 소개된 뒤, 2003년엔 아시아에선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뉴욕 브로드웨이 42번가의 뉴빅토리시어터(New Victory Theater)에서 막을 올린 뒤 이듬해 3월 오프브로드웨이 미네타라인극장에 난타전용관을 마련, 2005년 8월까지 공연했다.

당시 상황을 두고 그는 “K팝이 붐을 이루는 지금과는 너무나 딴판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97년 초연 이후 런던에 가서 공연을 해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현지 매니저가 한국이 어디냐고 묻더라고요. 얼마나 당황했는지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고 덧붙였다.

이제 그는 난타에 이은 ‘공연 한류’의 꿈을 품고 있다. 올해 처음 서울뮤지컬페스티벌을 만들어 창작뮤지컬 활성화에도 나섰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 영화를 누가 봤나요. 그런데 이젠 외화보다 더 봅니다. 뮤지컬도 그럴 수 있다고 봐요. 국내 뮤지컬 공연 150편 중 100편이 창작 뮤지컬이라면 물량은 충분하거든요. 국내 관람객을 늘리고 밖으로 나갈 때입니다.”

그는 ‘한류’의 연장선에서 싸이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싸이와 난타의 성공은 통하는 점이 있다는 얘기였다. 결국 외국인들이 보지 못했던 이국적인 면, 거기에 보편성이 따라주면 한국 문화도 충분히 세계에 먹힐 수 있다고 했다. “난타가 사물놀이 리듬은 몰라도 주방이라는 익숙한 공간을 배경으로 했듯, 강남스타일도 싸이의 외모와 춤은 독특했지만 음악 자체는 일렉트로닉의 범주에 있었죠.”

그렇다면 ‘난타’ 다음의 히든 카드는 뭘까. 그는 지난해 시작한 넌버벌 퍼포먼스 ‘웨딩’을 꼽았다. 결혼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에피소드를 춤과 노래로 만든 작품이다. 내년 4월 전용극장도 열 예정이다. “결혼식은 전 세계 어디서나 열리지 않나요. 당장 다음 주 대만에서 열리는 여행박람회에 갑니다. 난타 때처럼 여행사 공략이 첫 단추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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