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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과 기쁨에 대하여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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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호 34면

몇 년 전 일이다. 가까운 후배와 밥을 먹는데 그가 불쑥 한마디 하였다. “가족들도 잘 지내고, 특별한 걱정거리도 없는데 왜 이렇게 답답하고 힘든지 모르겠어요.” 나도 비슷한 심정이어서 뭐라고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기업의 잘나가는 임원으로 부족할 게 없는 사람인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 그의 말이 내 마음에 계속 남아 있었다.

어느 병원에서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은 것,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은 것”이라고 쓰인 액자를 보았다. 삶의 조건을 정확히 나타낸 말이라 하겠다. 누구나 돈·명예·건강을 갖추면 어려움 없이 살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와 같은 상태를 안락이라고 하겠고, 이를 얻기 위하여 온갖 애를 쓰며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데 안락한데도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행복의 사전적 의미는 ‘생활 속에서 깊은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상태’라고 되어 있다. 행복의 요체는 기쁨이라고 하겠는데 안락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첫째, 안락함은 깨지기 쉽고 언젠가는 반드시 깨지게 되어 있다. 건강은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시간과 함께 약해질 수밖에 없다. 삶 자체가 육체의 건강이 점차 쇠약해지며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 아닌가. 사람들의 평가도 언제 변할지 모르는 표피적인 것이며, 아무리 큰 명예도 시간과 함께 잊혀지기 마련이다. 안락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환경과 조건에 매달려 있어 이를 지키려면 노심초사를 피할 수 없다. 반면에 기쁨은 쉽게 깨지지 않는다. 기쁨은 외적 조건에 의존하지 않고, 깊은 내면에서 솟아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은 불행한 일이 닥쳐도 곧 회복할 수 있다. 이들은 삶의 기초를 환경이 아니라 정신에 두고 산다.

둘째, 안락은 안전하고 편안한 상태일 뿐이고 그 자체로 힘이 없다. 안락의 경험은 곧 사라지며,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 일시적이고 폐쇄적인 경험에 불과하다. 반면 기쁨은 힘이 있고 내면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자기 삶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친구와 깊고 진실한 대화를 나눌 때의 기쁨, 다른 이를 겸손한 마음으로 도왔을 때의 뿌듯함은 시간이 지나가도 자기 속에 남아 용기와 희망을 주는 자원이 된다. 또한 기쁨은 전염성이 강해 기쁜 사람 옆에 가면 저절로 기분이 상쾌해진다. 기쁨은 지속적이고, 개방적이다.

셋째, 안락은 환경에 따라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각적인 경험이다. 안락해지기 위하여 노력과 훈련이 필요 없다. 자신의 상태나 성장과 관련이 없다. 그러나 기쁨은 자신의 됨됨이와 성장의 열매이며, 가치에 대한 믿음과 자기 훈련으로 얻어지는 경험의 산물이다. 기쁨은 일시적 상태가 아니라 슬픔과 실패, 고통, 인생의 온갖 비극까지도 포용하면서 삶 자체를 수용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기쁨의 정도가 그 사람의 내적 성숙도를 말해 준다. 기쁨은 존재의 중심과 연결되어 ‘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며, 이를 ‘존재의 빛’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안락과 기쁨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이다. 기쁨은 정신적 고양(高揚)을 수반하는 존재의 경험이지만, 안락은 내면적 힘이 없는 감각적 경험에 불과하다. 안락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찾아야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많은 사람이 힘들어하는 이유는 안락함과 기쁨을 구별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것 아닐까. 삶에서 가장 큰 실수는 ‘가치가 높은 것’으로 채워야 할 소중한 부분을 ‘가치가 낮은 것’으로 채우고 만족하는 데 있다. 기쁨으로 충만한 삶 대신 안락한 삶이 행복의 전부라고 믿고 산다면 삶을 얼마나 낭비하는 것일까.

암과 투병하던 여성이 죽기 직전에 남긴 일기로 글을 맺는다. “나의 인생은 안락했다. 다른 사람의 시기를 받을 만했다. 그러나 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 마음속에 항상 허무한 바람이 불었고, 결코 안정을 얻지 못했고, 행복하지 않았다. … 나에게 병이란 무엇인가? 병이 나에게 빼앗은 것은 우리 가족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병이 나에게 준 것은 정말 큰 것이었다. 나는 슬픔을 알았고, 기쁨도 알았다. 사랑을 알고 신을 알았다. 쓸모없는 나의 초라한 삶에 신이 들어오셨다. 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윤재윤 춘천지방법원장을 마지막으로 30여 년간의 법관생활을 마쳤다. 철우언론법상을 받았으며, 수필집 『우는 사람과 함께 울라』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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