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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수교 20년 - 사대주의 산맥을 넘어 ④·끝 연행의 길, 자주의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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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마테오 리치가 1605년 세운 베이징의 천주교회 남당.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중국에 와서 들렀던 곳으로, 우리나라 서학의 근원지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인에게 세계의 중심은 베이징이었으며, 천주교회당은 서양문화와 접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조선시대 중국에 조공(朝貢)하기 위해 길을 떠났던 사절단의 여정은 보통 반년이 걸렸다. 길을 오가는 데만 석 달, 황제를 만나기 위해 베이징(北京)에서 체류한 기간이 보통 두 달 이상이다. 1900여㎞의 길을 다니는 일만 해도 여간 수고롭지 않았다.

 200~300여 명의 인원으로 짜인 사절단이 길에서 겪어야 하는 고통은 여러 가지였다. 우선 짙은 안개, 그리고 살을 파고드는 듯한 먼지, 뼈를 자근자근 두들기는 듯한 바람이었다. 1666년 조공사절의 부사(副使)로서 길을 나섰던 남용익(南容翼·1628~1692)의 시 ‘행역삼고(行役三苦)’의 표현이다.

홍양호(1724~1802)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낯섦, 두려움이 사절단을 엄습한다. 사절단이 조국의 경계였던 압록강을 건너 처음 일박하는 구련성이라는 곳은 인가가 드물고 수목이 무성해 호랑이와 표범 등이 출몰한다. 구련성 벌판에 장막을 치고 노숙했던 사절단 일행은 그런 맹수의 습격이 우선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장마가 지는 드넓은 요동 벌판에서는 물이 빠져나갈 곳이 없어 늪지대가 만들어지면 촌보(寸步)를 옮기기도 어려운 진창을 걸어야 했고, 정해진 목적지에 정해진 시간에 닿아야 했던 일정의 각박함도 먼 길 떠난 나그네들의 심사를 괴롭혔다.

 그럼에도 조선은 끊임없이 사절단을 중국에 보내고 또 보냈다. 중국이라는 거대 국가 중심으로 짜인 국제관계의 틀이 그러하도록 만들었고, 한반도의 지적(知的)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륙으로부터 지식상품을 들여와야 하는 문명적 욕구도 그런 연행의 잦은 발길을 만든 큰 요인이다.

 사대(事大)의 현실적인 이유를 넘어 성리학적 사고에 갇힌 많은 수의 조선 선비들은 중국을 무턱대고 높이 떠받드는 모화(慕華)의 좁은 틀을 넘어서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냉정한 관찰자들도 적지 않았다. 노가재(老稼齋) 김창업(1658~1721), 담헌(湛軒) 홍대용(1731~1783), 연암(燕巖) 박지원(1737~1805)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이 연행 사절을 따라 나선 길의 여러 체험들을 적은 기록은 방대한 연행록 가운데에서도 가장 빼어난 3대 산문집으로 꼽힌다. 이들은 일방적 모화, 편협하고 속절없는 사대주의에 있어서는 매우 차가울 정도의 국외자(局外者)였다.

 이들은 정식 벼슬아치로서 사절단에 끼어들지 않은 비(非)공식적 신분의 여행자였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수행 사절의 일정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면서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살피기에 주력했다. 그들의 발자취는 이제 뚜렷이 남은 게 없다. 그럼에도 본지 취재팀은 그들의 사행(使行) 족적을 따라 열심히 움직였다.

 누르하치와 훙타이지의 영혼이 서성거리는 선양(瀋陽)에서 박지원은 청나라 고궁 서문 거리를 열심히 뒤지고 다녔다. 점포를 관찰하고, 청나라 사람들의 상거래 관행도 유심히 살폈다. 노가재 김창업은 압록강을 건너 곧 도착하는 봉성(鳳城)에 이르러서는 요동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자취를 찾아 대열을 이탈해 봉황산(鳳凰山)에 오르기도 한다.

 과거에 응시해 벼슬 얻는 길을 버리고 문물 일반의 탐구에 몰두했던 담헌 홍대용은 베이징에 도착해 서양 신부가 머무르고 있는 베이징 천주교 남당(南堂)을 여러 차례 방문한다. 문을 지키는 수위로부터 냉대와 멸시를 받고, 신부로부터는 무관심의 결례를 겪지만 그는 오로지 서양 문물에 관한 호기심으로 이를 극복한다. 그리고 원근법이 살아있는 서양 벽화,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 전혀 새로운 우주관에 눈뜨게 하는 천문학 기기를 통해 지구 자전(自轉)설을 확신한다.

 취재팀은 그런 자취를 찾아다녔다. 압록강 근처의 봉성에서는 이곳을 지났던 조선 사절의 탄식을 읽었다. 사절의 대부분은 고구려의 실지(失地)를 안타까워했다. 봉성 인근이 당나라 대군을 물리쳤던 양만춘(楊萬春)의 안시성이 있었던 곳이라는 추정 때문이었다.

 선양과 산해관(山海關)에서는 청나라의 경제적 발전, 벽돌의 사용으로 견고한 성채가 어떻게 쌓이는지를 용의주도하게 살핀 박지원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했다. 베이징 천안문 광장 서남쪽에 있는 천주교 남당을 찾았을 때는 230여 년 전 이곳 정문 앞에서 그를 막아선 중국인 수위와 실랑이를 벌이던 홍대용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베이징의 천주교회인 남당의 내부 모습.

 베이징 천주교 남당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한계에 갇힌 조선 일부 선비들이 ‘세계’를 읽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이 모인 곳이다. 이곳의 서양 벽화와 파이프 오르간, 천체(天體) 관측용 기기(機器)를 통해 조선은 급기야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中華)의 세계관과 그로부터 연역한 ‘정통과 오랑캐’의 화이관(華夷觀)을 의심하며 그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싹을 틔울 수 있었다.

 베이징에는 그런 점에서 가볼 곳이 많았다. 천주교 남당은 그중에서 으뜸이다. 지금은 퇴락한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17세기 마테오리치가 지었을 때의 모습이 상당 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 베이징 천안문 광장 남쪽의 유리창(琉璃廠) 거리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선비들이 연행길에 나서 그 종점인 베이징에 왔을 때 꼭 방문하고자 했던 곳이다.

 각종 서적과 그림, 비석 탁본 등을 구입해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간접적으로나마 익히고자 찾았던 유리창 거리 역시 예전의 모습 그대로는 아니었다. 거리도 일부 좁아지고 상점 수도 적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부지런히 이곳을 찾아다닌 조선 선비들의 은근한 자취는 그려볼 수 있었다.

 수많은 조선의 연행 사절 중에 아주 이상한 광채를 발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 영조(英祖)와 정조(正祖) 연간에 살면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까지 올랐으며, 탁월한 학식으로 문명(文名)을 떨친 사람이다. 그는 김창업과 홍대용, 박지원과 달리 정식 사절의 신분으로 두 차례에 걸쳐 연행길에 올랐다.

단둥의 봉황산. 봉황산은 고구려 성이 있던 곳이다. 조선시대 연행록에는 많은 선비가 봉황산을 지나며 아쉬움과 회한을 표현하고 있다.

 아마, 연행의 신고(辛苦)한 여정 속에서도 드러낸 기개로 따지면 이계 홍양호(洪良浩·1724~1802)라는 인물은 그 으뜸을 차지할 만하다. 세계를 보는 그의 안목은 탁월했다. 그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이른바 중화주의의 틀을 강력하게 부정한 사람이기도 하다. “중국이라는 곳도 먼 우주에서 바라보면 손안의 손금 한 줄에 불과하다”는 식의 논리를 전개했다.

 고구려와 고려를 거치면서 잃었던 한반도의 북방 강역(疆域)에 관한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실용(實用)과 후생(厚生)의 실학적 관점을 유지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아울러 금석학(金石學)에 관한 방대한 지식을 쌓기도 했으며, 탁월한 학문적 경지를 쌓아 두 차례에 걸쳐 베이징을 방문하며 청나라 최고의 석학으로 꼽히는 『사고전서(四庫全書)』 제작의 책임자 기윤과 두터운 우정을 쌓기도 했다.

 그가 자신에 앞서 수많은 선비가 다녔던 연행에 관해 정의를 내린 적이 있다. 이런 식이다. “천하를 돌아다니는 방식에는 족유(足遊), 목유(目遊), 심유(心遊)가 있다. 갔다가 돌아와도 제대로 그 허실(虛實)을 살피지 못하면 그냥 돌아다닌, 발로 다닌 데 지나지 않는 족유다. 상대의 허와 실을 제대로 보며 같음(同)과 다름(異)을 살피면 그보다 좋기는 하나 이 또한 눈으로만 살핀 목유다. 도시를 살피고 백성을 관찰해 치(治)와 란(亂)을 보며, 아울러 상대가 성(盛)할지 아니면 쇠(衰)할지를 간파하면 그것이 바로 마음으로 살피는 심유다. 목유도 어려운데 심유를 할 수 있을까.”

 그는 연행의 최고 경지를 심유에 두고 있다. 상대의 허와 실, 나아가 성과 쇠의 가능성까지 미리 내다봐야 한다는 주문이다. 홍양호의 문학세계를 연구한 성균관대 진재교 교수는 그의 저서 『이계 홍양호 문학연구』에서 “이런 언급은 민족의 현실을 보다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정확하게 인식해야 나올 수 있다.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민족의 현실을 파악해 객관적인 동향과 그 대응을 촉구하는 이계의 사고는 당대 어느 누구보다도 앞서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열린 마음과 눈, 그리고 내가 지니지 못한 것에 대한 자각을 통해 축적하는 지식, 게다가 남에게 함부로 휘둘리지 않는 자주적 입장을 말하는 내용이라고 봐야 하겠다. 홍양호는 그런 점에서 조선 500년의 장구한 연행 여로(旅路)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마음까지 동원해 상대를 철저하게 간파하라는 홍양호의 ‘심유’. 늘 복잡한 국제정치의 숲을 헤쳐 나가야 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크게 와 닿는 말이 아닐 수 없다.

특별취재팀=유광종·허귀식·박소영·예영준·민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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