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로 보고… 답답해서 보고… 새해 벽두 점집 열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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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컨대 '점(占)'만큼 언론이 다루기에 까탈스러운 것도 없다. 언론이 드러내놓고 점의 효력을 전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팔자(八字)만 갖고 사람을 따지는 건 아닌지, 과학 문명의 시대에 미신이나 전파하는 건 아닌지 찜찜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온통 점 천지다. 주위에 점 한 번 안 본 사람이 없고 사주(四柱) 정도는 알고 사는 이가 태반이다.

결혼.취직.시험 등 소소한 개인사부터 나라의 대소사(大小事)까지 '삼재(三災)'니 '××살(煞)'이니 하는 비과학적 용어가 곧잘 동원된다. 신문에서 하루라도 '오늘의 운세'가 빠지면 신문사엔 항의 전화가 빗발친다. 한국역술인연합회가 밝힌 회원수는 30여만명. 해마다 3천명씩 늘고 있다.

경희대 서정범 국문학(명예교수)교수는 "내일을 알고 싶은 것은 인간의 영원한 욕구"라며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고 개척하는 것 또한 인간의 운명이요 삶의 의미"라고 설명했다.

나무에 비가 내리는 운세여서 큰 탈 없는 무난한 한해가 될 것이라는 계미년(癸未年). 새해 신수(身數)를 보려는 이들로 문턱이 닳고 있는 점집들을 돌아다녔다. 고맙게도 점쟁이들은 총각 기자를 보고 "봄이 오면 꽃이 피니 연분을 기다려라"고 일러줬다. 장가는 갈 팔자인가 보다.

*** "사주는 과학이다."

서울 성북구 동선동 일대의 점성촌(占星村) 에는 70여호의 점집들이 미아리 고갯길을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늘어서 있다. 이른바 '미아리 점집'들이다. 쓰레기가 날아다니는 추레한 골목길이 을씨년스럽다. 이 일대의 역술인 대부분은 맹인이다.

이곳 생활이 22년째라는 권윤자(여.62)씨는 "1년 수입의 대부분이 연초 석달에 몰려 있다"며 "연초를 제외하곤 마땅한 수입이 없어 문을 닫는 곳도 많다"고 전했다.

복채는 한번에 1만~5만원. 경기가 나빠지면 점성촌의 경기는 좋아진다. 요즘 경기는 썩 괜찮은 편이다.

경기고.서울대를 나와 대기업 CEO를 하다 역술인이 된 김남용(58)씨의 서울 반포동 역술원을 찾았다. 그는 "사주는 과학이자 통계"라고 단언했다.

점(占)이란 고대 중국인들이 거북이의 등껍질이 갈라진 모양을 보고 앞날을 예측하면서 시작됐는데 수많은 등껍질 표본과 국사(國事)를 대조하고 조합해 '역술(易術)'의 기본인 '괘(卦)'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과학적인 통계의 산물이지 허무맹랑한 미신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김씨는 "역술인은 오랜 연구를 마쳐야 하는 전문 직종"이라며 "현대 사회에서 역술은 직원 채용이나 증권 투자같은 경제 활동에도 적극 도입해야 할 미래 예측 산업"이라고 말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역술인 중 하나인 백운산씨는 "역술은 틀림이 없지만 참조만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역술의 '역(易)'이 바꾼다는 뜻 아닙니까. 운명은 바꿀 수도 있는 게 아니라 바꿔야만 하는 것이란 얘기죠. 역술인은 좋은 것은 좋게 말하고 나쁜 것은 나쁘지 않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

면전에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뒤돌아서니 헷갈린다. 점이 맞는다는 얘기냐, 틀린다는 얘기냐.

*** "심심한데 점이나 볼까?"

기기묘묘한 패션의 젊은이들이 모이는 유행의 최첨단 서울 압구정동 로데오거리. 이 곳의 다른 이름이 '점술 밸리(Valley)'다. 동서양의 점성술을 모아놓은 역술백화점 10여곳이 성업 중이고 사주 카페도 60여곳이 들어서 있다.

1998년 처음 문을 열었다는 '점술왕국'에 들어섰다. 주황색 계통의 은은한 간접 조명 아래 수정 구슬.타로 (Tarot) 카드 등으로 치장된 분위기가 묘하다.

3만원짜리 타로 카드 점을 쳐봤다. 신통했다. 사주 풀이와 비슷한 점괘가 나왔다. 동서양의 점성술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몰라도 여하튼 결과는 비슷했다.

이곳을 찾는 주 고객은 20대 초반의 젊은이들. 얼굴에 수심 그득한 중장년이 미아리 고개를 찾아간다면 "심심한데 점이나 치며 놀자"는 젊은이들이 여길 찾는다. 해서 상담은 무슨 게임을 하듯 늘 요란하고 시끄럽다.

이희수 실장은 "하루 수입이 1백만원이 넘을 때가 많다"며 "부적 팬티.휴대전화 부적 서비스 등 사업 확장을 통해 신종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됐다"고 말했다.

인터넷에선 점술이 황금알을 낳는 인기 메뉴다. '도통'이란 운세 사이트는 회원수만 32만명이고 '사주닷컴'사이트의 하루 평균 접속자수는 5만~6만명에 달한다.

인터넷 점술의 특징은 이른바 '퓨전(복합)운세'. 사주.궁합.타로 카드 등 동서양의 점술이 총동원되고 기이한 방법으로 운세를 점친다. 주민등록번호로 길흉(吉凶)을 내다보고 행운에 당첨되도록 도와준다는 부적도 잘 팔린다. 주인과 궁합이 맞는 애완견 이름을 작명하는 서비스도 인기란다.

별자리 운세는 백화점 마케팅에도 쓰인다. 현대백화점의 최근 고객 조사에 따르면 겨울철 별자리인 물고기자리(2월 19일~3월 20일 생)와 물병자리(1월 20일~2월 18일) 고객이 가장 많이 매장을 찾았다. 반면 여름철 별자리인 게자리(6월 22일~7월 22일) 고객의 매출이 가장 적었다.

손민호.이경희 기자 <ploveson@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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