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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시골, 그곳에 '책의 천국'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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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웨일스 지방에는 특이한 마을이 하나 있다. 인구 1천3백명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에 37개의 헌책방과 16개의 갤러리가 있고, 5월 말에는 시인.작가.정치인.배우들이 모여 문학축제를 벌인다.

이 곳은 아름다운 경치와 독특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 덕에 휴양지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는 '헤이 온 와이(Hay-on-Wye) 책마을'

(http://www.hay-on-wye.co.uk)이다.

와이강 건너에 있는 이 마을은 숲에 둘러싸여 있어 '와이 겔리' (Y-Gelli: '작은 숲' 이라는 뜻을 가진 웨일스어로 웨일스에서는 영어와 웨일스어를 함께 쓴다) 로도 불린다.

책마을의 창시자 리처드 부스가 운영하는 두 곳의 헌책방 가운데 하나인 '헤이 캐슬' (http://www.richardbooth.demon.co.uk)을 찾아갔다.

1200년께 윌리엄 드 브레오스 2세에 의해 세워진 이후 수없이 외부로부터 공격받았던 헤이 캐슬은 왼쪽 벽이 조금 허물어진 채 서 있다.

그러나 지금은 두 곳을 합쳐 75만권의 장서를 갖춘, 세계에서 가장 큰 헌책방으로 바뀌어 하루 1천명이 찾아온다니 천수(天壽) 를 누리는 기쁨이 바로 이런 것이렷다!

리처드 부스가 이 성을 사들여 1961년에 헌책방을 연 것은 헤이 온 와이에 책마을을 만들면 나중에 세계적인 명소가 되리라 미리 내다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지금 그 꿈은 이루어졌고, 헤이 온 와이는 '웨일스라는 왕관에 박힌 보석' 이 되었다.

헤이 캐슬 마당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낡고 녹슬어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아 딱딱한 호밀빵으로 만든 샌드위치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책을 읽고 있다.

성, 아니 헌책방 안에 들어가니 긴 곱슬머리 청년이 웃으며 맞아준다. 헌 책이 꽉 찬 1층과 귀족의 서재처럼 꾸며진 2층을 돌아보고 나서 "고흐의 펜화집을 구할 수 있겠느냐" 묻자 청년은 안쪽 방으로 안내한다.

거기에는 걸작을 남긴 화가들의 오래된 화집이 꽉 차있는데, 도서관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오래되고 희귀한 책들이다. 낡은 성안에서 오래된 그림들을 뒤적이다 보면 쾨쾨한 책 곰팡이 냄새조차 좋아진다.

헤이 마을 책방들은 변화무쌍한 이 곳 날씨만큼이나 여러 가지 모습이다.

책 수집가들을 위한 'Acedia Books & Booksearchers' , 아름다운 책들의 집합소라 할 만한 시집 전문책방 'The Poetry Bookshop' , 안을 온통 빨간색으로 칠하고, 으스스한 소품으로 꾸민 추리소설 전문책방 'Murder And Mayhem' , 화단에 꽃을 가꾸며 식물.곤충.동물.자연에 관한 책으로 가득 채운 'C.Arden' 같은 독특한 책방들 덕에 책 애호가들이 이 곳을 더욱 아끼는 것이겠지!

'The Children' s Bookshop' 과 'Rose' s Bookshop' 은 어린이 책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The Children' s Bookshop' 의 주인 주디스는 올해 예순 두 살의 할머니다. 주디스는 희한한 팝업북이나 듣도 보도 못한 파노라마북 말고도 같은 작품을 각각 다른 일러스트레이션으로 그린 책들을 비교해서 보여준다.

아서 랙햄이 1872년에 그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초판본을 보여주며 그로테스크한 그림이라고 설명하더니, 1919년.1952년도 판에서 1988년에 출판된 앤서니 브라운의 것까지 하나 하나 꺼내 보이며 어찌나 즐거워하는지, 자식 자랑하는 엄마가 따로 없다.

이 마을에서 희귀본, 특히 초판본은 유리 벽장 안에 따로 보관, 전시되는 각별한 대접을 받는다. 이곳 사람들은 낡은 것을 처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대로 보존하기를 즐기는 여유가 마을전체에서 정겹게 느껴진다. 1611년에 찍은 지도, 그들에겐 너무 흔한 들꽃과 나비를 소재로 한 수백년 된 앤티크 프린트, 네온사인을 전혀 볼 수 없는 구식 건물들, 5펜스에 세 권하는 헌책이 담긴 바구니….

사람들 사는 모습은 더 정겹다. 54년 동안 마을 도서관에서 일한 베티 존스와, 휴가를 아이들과 함께 마을 도서관에서 보내는 피터씨 가족, 마을 축제를 후원하는 것이 즐거움인 택시 운전사, 점심 먹으러 갔으니 2시 지나서 오라는 쪽지를 남기고 사라진 책방 주인(6시 전에는 모두 문을 닫으면서도) , '홀리고리' 라는 특이한 악기 소리와 길거리 연극 공연. 이 모든 것이 넉넉하게 어우러진 마을.

날마다 새 것을 만들어내서 사람들 기를 죽이는 기계 문명은 비켜간 마을. 그래서 헤이 마을에서 묵었던 나흘은 곤하게 단잠을 자고 일어난 기분이다.

헤이 온 와이가 한국에도 생긴다면 과연…?

파주에 이 곳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헤이리 아트 밸리' 가 생긴다고 한다. 이런 거대한 계획이 진행되는 것 자체가 '새 역사를 창조' 하는 셈이나 어찌 오랜 세월 서서히 익은 장맛에 비할 수 있으랴!

그러기에 현실화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일이다. 더구나 그 다음이 더 중요하다. 명소라고 찾아 가봐야 전국 음식점이 버티고 있는 건 이제 그만하면 됐다. 어떻게 해서든 저 혼자 튀어보겠다고 악을 쓰는 간판도, 주변 환경 무시한 건물도 볼 만큼 봤다. 다행히 이런 모습이 아닌, 집과 자연이 같이 가는 개념이라 하니 반가운 일이다. 헤이 마을이 런던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것이 오히려 매력으로 작용한 역설(逆說) 도 다시 새겨 보자.

책마을에서 더 없이 편안한 휴양지로, 작은 마을 축제에서 세계적인

'헤이 페스티벌' (http://www.hayfestival.co.uk)이 될 정도로 헤이 온 와이가 명소로 자리 잡은 까닭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건물들과, 녹녹지 않은 세월과, 이 모든 걸 감싸안는 자연이 조화를 이루었던 것 이상으로 '서두르지 않는 삶' 과 '지킬 것은 지키는 그들만의 문화' 가 있기 때문이다.

헤이 온 와이=허은순
동화작가.애기똥풀의 집(http://pbooks.zzagn.net)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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