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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왕 자존심 버리고 희생 번트… 팀 부진 땐 자진 삭발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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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호 19면

‘아시아 홈런왕’ 이승엽(36·삼성·사진). 9년 만에 친정팀으로 복귀한 그는 예전처럼 홈런을 뻥뻥 때리진 못했다. 하지만 팀은 더 강해졌다. 삼성이 2년 연속 정규시즌 우승을 달성한 배경에는 이승엽이 있다.

삼성 2년 연속 정규시즌 우승 공신, 이승엽

지난해 일본프로야구 생활을 접고 복귀한 이승엽은 시즌 내내 중심 타자로 맹활약했다. 도루를 제외한 공격 주요 부문에서 10위 안에 들며 죽지 않았다는 걸 보여줬다. ‘역시 이승엽’이라는 칭찬이 이어졌다.

‘역시 이승엽’이라는 말의 뜻은 예전과 좀 다르다. 과거엔 홈런을 몰아치던 파워와 타격 센스에 대한 찬사였다면, 지금은 타자로서 제 역할을 하면서 후배의 귀감이 되는 그를 두고 하는 칭찬이다. 삼성 선수들은 “이승엽 선배가 들어와 우승할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이승엽은 개막에 앞서 “삼성은 지난해 우승팀이다. 내가 들어왔는데 성적이 떨어지면 안 된다”고 부담감을 드러냈다. 이승엽을 영입한 삼성은 최강 전력으로 평가받았다. 이승엽은 “나만 잘하면 된다”고 했다. 다만, 자신이 들어와 잘 다져진 팀워크가 깨지는 것은 걱정했다. 2003년 56홈런을 쐈을 때 스포트라이트가 자신에게 쏠려 분위기가 처진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해 삼성은 한국시리즈에 나가지 못했다.

이승엽은 자세를 낮췄다. 묵묵히 훈련에 집중하고 후배들을 돌봤다. 팀이 부진했던 6월 초엔 자진 삭발을 해 선수단에 자극을 주기도 했다. 하위권에 머물던 삼성은 이때부터 거짓말처럼 치고 나갔다. 7월 중순부터는 1위 자리를 한 번도 내주지 않았다. 이승엽은 “(다른 선수들에게 영향을 줄까 봐) 인터뷰 요청도 많이 고사했다. 이런 것들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승엽은 전반기 16홈런을 때려 박병호·강정호(이상 넥센) 등과 홈런왕 경쟁을 벌였다. 한·일 통산 500호 홈런을 넘겼고, 7홈런을 추가하면 양준혁(은퇴)의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을 갈아치운다. 예전처럼 장타를 몰아치진 못해도 한 방 능력은 살아 있다. 하지만 이승엽은 홈런왕 얘기가 나올 때마다 손사래를 쳤다. “마음과 몸이 다르다. 예전 같으면 넘어갈 타구가 담장 앞에서 잡힌다”는 것이다.

후반기 들어 체력이 떨어지자 이승엽은 큰 스윙 대신 정확성에 초점을 맞춰 살아 나가는 데 집중했다. 9월 24일 대구 롯데전에서 그의 헌신이 드러났다. 이승엽은 6회 무사 2루에서 올 시즌 처음으로 희생번트를 댔다. 0-1에서 동점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는 홈런타자의 자존심을 버리고 팀을 먼저 생각했다. 도루도 6개 성공시키는 등 몸을 사리지 않았다.

이승엽은 중심타자로서 손색없는 활약을 펼쳤다. 126경기에 나와 타율 0.307(5위)에 21홈런(5위) 85타점(3위)을 올려 팀이 우승하는 데 힘을 보탰다. 잔부상이 끊이지 않는 중에도 타선을 지키며 2011년 홈런왕인 후배 최형우의 부진을 메웠다. 지난해 팀 타율 6위(0.259)에 그친 삼성은 올해 8개 구단 중 최고 타율(0.273)을 기록하며 공·수 조화가 완벽한 팀으로 거듭났다.

이승엽은 정규시즌 우승이 확정된 뒤 잔여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최다안타와 득점 타이틀을 사정권에 뒀지만 왼손 중지와 왼어깨 부상 등을 치료하고 한국시리즈를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서다. 늘 팀을 먼저 생각하는 이승엽다운 결정이다.

2002년 이후 10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나서는 그는 각오를 묻자 “2등은 의미가 없다. 부상이나 몸맞는공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자신을 다잡았다. 이승엽의 SNS 대문 문구는 최근 들어 ‘얼마 안 남았다. 신발끈 조여서 정상까지 가보자’로 바뀌었다. 그는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처음 우승하고 펑펑 울었다. 이번에는 정상에 선 뒤 “기쁨을 누리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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