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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세상] 멍텅구리배의 상념

중앙일보

입력

영화를 깔보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요즘 영화보다 못한 소설들이 많습니다.

사회적.인간적 메시지로 강하게 양심이 움직이는가 하면 스토리나 영상이 너무 아름다워 오래도록 가슴에 퍼지는 좋은 영화들이 많습니다. 단편 영화를 시청하며 가난하고 짧은 영상에 사회와 삶의 의미를 담으려는 노력에 박수도 보냈습니다.

필명의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요즘 나오는 젊은 소설가들의 소설을 읽으며 이제 소설은 메시지도, 인간적 울림도 포기한 것 같다는, 안타까운 마음을 떨칠 수 없습니다.

방학과 휴가가 있는 출판시장의 여름 성수기에 맞춘 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여물지 않은 감성을 자극하는 멜러물이나 화끈하고 자유로운 섹스를 다룬 작품들이 많아 소설이 퇴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예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소설(小說) 을 대도(大道) 와는 거리가 먼 꾸민 말로서, 명예를 구하는 속된 나부랭이의 말 등 부정적으로 보아왔습니다.

서양에서도 중세소설인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로맨스(romance) 로 보고 그 대립 개념을 노블(novel) , 즉 근대 소설이라 부릅니다. 노블은 인물의 살아 있는 성격과 사회적 현실을 탐구, 좀더 나은 인간성과 사회를 이루기 위한 시민정신의 총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젊은 소설들은 근대소설에서 오히려 퇴행, 속된 나부랭이들의 황당무계한 로맨스로 나가며 마치 나쁜 영화들과 흥행 싸움을 벌이려는 듯한 작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읽은 중진 작가 한승원씨의 장편 『멍텅구리배』(문이당.8천8백원) 는 여러 면에서 후배 작가들을 위한 회초리가 될 것 같습니다.

먼저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다를 주제.소재로 한 작품을 30년 넘게 써오고 지금도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집에 살고 있는 작가가 이 작품을 위해 1년 가까이 멍텅구리배도 직접 타보는 등 현장 취재를 했다는 것입니다.

해서 바다와 그 배 위에서의 삶의 묘사가 신선하게 폐부에 와닿습니다. 거기에 바다와 별, 해와 달에 관한 풍부한 전설들이 가공돼 우리네 삶을 해무(海霧) 처럼 신비럽게 감싸며 신화적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지난 연대에는 명분이었던 이념이나 진보가 현실화되며 심한 분열.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를 냉철하게 읽어내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수.기득권을 대변하는 선장과 그리고 배 위에서만이라도 평등 사회를 이뤄야되겠다는 전교조 출신 신참 선원의 대결이라는 줄거리와 인물들의 성격이 우리 사회를 축약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것을 지켜보는 민초와 나약한 지식인을 대변하는 다른 선원들의 시각과 행동 등을 통해 우리 사회에 메시지도 보내고 있습니다.

"자기가 해석하고 정의 내린 생각 속에 모든 것을 가두려 들었다. 자기 자신마저 가두려 했다. 이념에다 자기를 대입해 가둔 채 살아가고 있었다. " 선장에게 맞서다 죽어간 신참 선원에 우호적이었던 한 등장인물의 이러한 시각이 곧 이 사회에 던지는 작가의 메시지로 볼 수 있습니다.

인생과 사회에 대한 근면하고도 진지한 탐구를 소설은 놓을 수 없으며, 또 더 나은 삶과 사회를 위한 소설적 질문은 매양 새롭게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멍텅구리배』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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