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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속보! 인터넷 블랙아웃 … 오늘 월급날인데 어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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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주말 아침에 공상(空想) 같은 ‘발칙’한 얘기. 중앙일보와 국책연구기관인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이 공동으로 한국 사회에서 발생 가능성은 아주 낮지만 언제든 일어날 수도 있는, 그러면서도 사회·경제적으로 파급효과가 큰 네 가지 상황을 가정해 봤다. ‘핵발전소 사고’ ‘인터넷망 붕괴’ ‘75세 은퇴 사회’ ‘에너지 가격의 급등 또는 급락’이 그것이다. 이런 사건을 학계에서는 이른바 ‘X-이벤트(극단적 사건)’라 부른다. ‘X’는 ‘Extreme’을 줄인 말이다. 현대사회는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한 곳에서 발생한 위험 상황이 다른 곳에서 어떤 무서운 파장을 일으킬지 종잡기 어렵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말한 ‘위험사회’가 그것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X-이벤트를 미리 그려보고 대안을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 이번 ‘발칙한 공상’ 연구엔 본지 취재기자가 함께했다.

고리원전서 핵발전 사고 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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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 3시 대전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2층 방재상황실 모니터에 붉은빛이 들어왔다. 제주도 서쪽 끝 고산리에 설치된 방사선 감시기에 이상 신호가 감지된 것. 방사선율이 정상치를 훨씬 웃돌아 비상 수준임을 알리는 신호다.

수십 분 뒤엔 마라도와 가거도 감시기에서도 이상 신호가 감지됐다. 두 시간 뒤에는 서해안 일대 지역 관측소에서 모두 같은 신호가 감지됐다. 같은 시각, 깊은 잠에 빠져 있던 KINS 직원들의 휴대전화에도 이상을 알리는 문자메시지가 떴다. 비상소집이다. 2시간 뒤 KINS로 모인 직원들은 “중국 해안도시의 원전 쪽에서 방사능 유출사고가 나 방사능 물질이 편서풍을 타고 서해안으로 온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인터넷이나 외신에 중국 원전 방사능 사고를 알리는 뉴스는 없었다. 중국 정부가 언론을 통제하고 있다는 증거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오전 6시. 전국 120개 감시기 중 남서 지역의 48개에서 비상 신호가 떴다. 오전 7시. 정부는 중국에서 심각한 원전사고가 발생했다는 최종 판단을 내리고 방송을 통해 국민에게 외출을 자제하고 가축을 실내 축사로 옮길 것 등을 권고했다. 이어진 대혼란. 생수·라면 사재기, 중국산뿐 아니라 모든 농수축산물에 대한 불신, 출국하려고 국제공항에 몰려드는 외국인들….

 중국 핵발전소에 사고가 났을 경우의 상상하기 싫은 시나리오다. 중국에서 핵발전 사고가 나면 우리나라는 직접 피해국인 중국보다는 덜하지만 여러 분야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편서풍이 항상 중국에서 한반도 쪽으로 분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의 원전사고보다 더 무서운 게 중국 원전사고다.

중국은 8월 현재 동쪽 해안도시를 중심으로 14기의 원전을 가동하고 있다. 신축 원전도 있지만 노후 원전도 많다. 중국의 원전사고 은폐 가능성은 전례에 비춰 보면 아주 없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실제로 2011년 5월과 10월 광둥성 다야완 원전에서 방사능 누출사고가 발생했다. 중국 정부는 이를 한 달여 동안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다행히 당시 사고는 원전 외부로 방사선이 누출되지 않은 경미한 것이었다.

 STEPI는 중국에서 원전사고가 발생할 경우 우리나라에서도 지하수·토양·해양·대기 등의 환경오염이 심각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방사능 물질에 접촉하면서 사람과 동물의 면역체계가 약화돼 갑상샘 암류의 질병 발생이 증가하게 된다. 한반도가 방사능의 위험에 노출됨에 따라 해외 기업 철수, 증시 급락, 외환 유출 등 경제 전반에도 위기가 올 수 있다.

 우리나라 경남 고리원전에서 일본 후쿠시마와 같은 핵발전 사고가 난다고 가정하면? 중국보다 상대적으로 안전장치가 잘 갖춰진 핵발전소이긴 하지만 우리가 불리한 조건도 있다. 핵발전소 주변에 인가가 적은 일본·중국과 달리 반경 30㎞ 안에 부산과 울산시민 340만여 명이 살고 있다.

대책이 있을까. X-이벤트 연구팀은 우리나라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예방적 차원이 강조돼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예방적 차원의 노후 원전 폐쇄, 모든 원전에 대한 엄격한 스트레스 테스트 실시, 원전 관리의 투명성 확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권고하는 대피소·의약품·비상식품 등이 그것이다.

정보통신 최강국의 그늘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21세기 유비쿼터스 시대에 인터넷이 붕괴한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것도 정보통신 최강국 우리나라에서. ‘그냥 인터넷 좀 안 하고 참지 뭐…’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인터넷이 멈춰버리면 곧바로 타격을 받는 곳이 주식시장이다. 주식시장 거래 규모는 시황에 따라 하루 4조~9조원을 오르내린다. 거래가 중지되면 내외국인 투자가 중단된다. 인터넷뱅킹과 카드결제 등도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다. 기업은 직원 월급도 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2차로 자금 유동성이 악화하고 금융업무 전반이 마비된다.

 인터넷쇼핑 정도는 참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전자상거래 규모는 999조원. 최근 3년간 연평균 16.6%씩 증가했다. 온라인쇼핑몰 거래 중단은 택배회사 같은 운송산업에도 직격탄이다. 2011년 국내 택배시장 규모는 3조5000억원에 이른다.

 공공 행정망 역시 타격을 피해 갈 수 없다. 인터넷 붕괴를 가정할 때 정부가 흔히 내놓는 논리가 있다. “우리나라는 행정·금융 등의 전산망이 모두 분리돼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 X-이벤트 연구팀의 결론은 달랐다. 행정·금융 등 국가 기간망은 완전히 분리돼 있는 듯 보이지만 유·무선 곳곳의 지점에 일반 인터넷망과 연결된 부분이 있다. 한 곳의 사이버 테러가 얼마든지 국가 기간망으로 침투할 수 있다.

 실제로 그간 금융전산망이 뚫렸다는 보도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행정전산망이 마비된 것도 여러 차례다. 실제 테러 등에 의한 물리적 충격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교량 아래를 잘 살펴보면 인터넷망과 국가 기간망이 나란히 지나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리적 공격을 받으면 ‘기간망의 분리’란 의미 없는 얘기가 된다.

 문제는 ‘전국적 차원에서 한꺼번에 인터넷이 불통되는 사건이 있을까’ 하는 것이다. 연구팀이 관련 기관 전문가들과 스터디 끝에 얻은 결론은 ‘확률은 매우 낮지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STEPI의 윤정현 연구원은 “예방적 차원에서 주요 기간망의 물리적 안정성을 점검하고, 통신망 간 접점 부분에 대한 집중적인 보안검역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또 사고가 났을 경우에 대비해 인터넷 전송로를 다양화하고 국가 주요 시설의 백업(back-up) 센터를 구축하는 등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령화 사회는 현재진행형

 우리나라 기대수명은 2010년을 기준으로 남성 77.2세, 여성 84.1세를 기록했다. 1980년과 비교해서는 남성 15.4년, 여성 13.4년이 늘어났고 40년 전에 비해서는 무려 20년 가까이 늘었다. 반면 출산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인 1.23명이다. 지금 속도대로 2060년이 되면 인구 10명당 4명이 노인이 된다. 생산 가능 인구 100명이 노인 80명을 부양하는 ‘일대일 부양시대’에 진입하게 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30년에는 평균 기대수명 85세, 건강수명 78세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고령화의 결과는 심각하다. 노동인력 수급 차질, 세수 감소, 연금 고갈, 재정 악화 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잠재성장률은 2030년부터 마이너스로 돌아설 것으로 예측된다. 여기서 현재 노인의 개념인 ‘65세’가 재정의될 필요성이 생긴다. 평균수명 70세 때 65세와 평균수명 80세 때의 65세는 건강상태나 지적능력이 다르다. 사회는 더 이상 65세 이상 75세 미만을 고령화라 부르지 않고 ‘신(新)장년층’이라 부르게 될 날이 올 수 있다. 75세가 돼야 연금이 나오고, 그전까지 일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70세가 넘어도 경로석에 못 앉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

 보건사회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정부의 관련 대책이 사실상 없기 때문에 고령화는 현재 상태로도 이미 알려진 X-이벤트”라고 말했다.

 X-이벤트 연구팀은 ▶노인 개념 재정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 ▶ 65~74세 ‘신(新)장년층’ 일자리에 대한 제도적 지원 ▶맞춤형 평생교육 기회 부여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에너지 가격의 급변

 에너지 가격은 급등과 급락의 경우 모두를 다뤄봤다.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개발이 실용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포스트 브릭스(BRICs)로 불리는 터키·베트남·태국·인도네시아 등에 고도성장의 바람이 불어 세계 에너지 소비의 블랙홀로 떠오른다. 여기에 중동전쟁과 같은 국제정세 불안 요소가 발생할 경우 유가가 다시 치솟는다. 유가가 배럴당 400달러까지 올라가고, 정부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강제 2부제를 시행한다. 시내 주유소 기름값은 L당 5000원에 육박한다.

 이런 상황이 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까?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 6위의 원유 수입국이다. 더 심각한 건 수입 에너지 의존도다. 2007년 현재 국내 에너지 소비의 96.5%를 수입에 의존한다. 지금과 같은 조건에서 유가 배럴당 400달러는 재앙을 넘어서는 수준이다. 2008년 현대경제연구소 연구에 따르면 유가가 160달러에 도달할 때 상품수지는 706억 달러 줄어들고 경제성장률은 1.5%포인트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 물가는 급등한다. 농산물은 20~50%, 서비스업도 5~10% 가격이 상승할 전망이다.

 수송 부문은 직격탄을 맞는다. 유가가 1달러 오를 때 수송 비용이 1% 증가한다. 2008년에 나온 미국 보고서 ‘고유가가 화물 운송에 미치는 영향’에 따르면 FEU(40피트 컨테이너 1개)당 2000년 수송 비용은 3000 달러였다. 하지만 2008년 유가가 배럴당 140달러가 됐을 땐 8000달러에 달했다. 이를 바탕으로 배럴당 400달러가 됐을 때 수송비를 추측해 보면 2만5000달러에 이른다. 여객 수송은 더하다. 국내항공사의 한 관계자는 “배럴당 400달러 시대가 되면 항공사는 모두 문을 닫아야 할 지경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수송 부문의 전 세계적 대혼란이 예상된다. 이외에도 유가 급등은 글로벌 전 산업 분야의 생산원가 상승과 글로벌 경기침체 등에 영향을 미치고 급격한 물가 인상과 실업률 증가, 가계 부채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반면 유가 급등이 의외의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대체에너지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대체에너지 투자와 연구가 폭발적으로 늘어 예측한 것보다 더 빨리 신재생에너지 기술 등이 상용화하는 시나리오가 그것이다. 이때가 되면 에너지 급등이 아니라 지금의 10% 수준으로 에너지 가격이 급락할 수 있다. 대체에너지 개발은 개별 국가 단위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여러 국가가 공동으로 투자, 개발하는 방법이 효과적이다.  

중앙일보-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공동 기획

핀란드 ‘일곱 가지 쇼크 연구’

노키아·유럽 위기 이미 현재진행형 공포감 조장 아닌 미래 투자로 봐야

왜 이 시점에 ‘X-이벤트’를 얘기할까. ‘일어날 가능성이 낮은 것까지 굳이 파내서 고민해야 할까’라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쓸데없는 사회 불안 조장 아니냐’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는 일어날 가능성이 낮은 사건이라고 안심할 수 없다. 당장 대책을 세우지 못하더라도 사람들이 사고의 여파에 대해 인식할 수 있어야 손실과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 일본의 대지진과 핵발전 사고, 미국의 9·11 테러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X-이벤트’ 연구는 우리나라가 처음이 아니다. 이미 핀란드가 지난 2월 ‘7가지 쇼크와 핀란드 ’라는 제목의 ‘X-이벤트’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핀란드 정부는 소규모 개방경제로서 복잡한 글로벌 환경 속에서 극단적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이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지를 고민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7가지 쇼크, 즉 ‘유럽통화연맹(EMU) 붕괴’ ‘핀란드 대표 기업 노키아 해외 이전’ ‘중국의 저성장’ ‘펄프·제지산업 해외 이전’ 등이다. 핀란드 정부가 2009년 오스트리아 국제응용시스템분석연구소(IIASA)에 의뢰한 연구 과제다.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핀란드의 X-이벤트 7가지 중 두 가지, ‘노키아’와 ‘EMU’는 이미 현재진행형이 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핀란드가 X-이벤트 연구를 더 일찍 시작했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STEPI가 당초 꼽은 한국사회의 X-이벤트는 4가지가 전부는 아니다. 북한의 격변, 중국의 정치·경제적 혼란, 대기업 해외 이전, 백두산 폭발 등 다양한 후보가 나왔다. 박병원 STEPI 미래연구센터장은 “사실 한국사회의 X-이벤트를 4가지만 꼽는 것은 무리”라며 “이번 연구를 계기로 우리 사회의 X-이벤트에 대한 연구를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주말 아침의 발칙한 공상’은 25일 서울 팔래스호텔에서 열리는 국제심포지엄 ‘X-events :한국적 맥락에서의 정책 함의’에서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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