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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과학자 믿어도 될 때다 … 연구 자율성 확 높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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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우리나라 5대 과학기술대 총장들이 18일 경북 포항 포스텍 국제관에서 한국 과학 발전 방향을 논의하는 좌담회를 열었다. 총장들은 이 자리에서 “정부가 과학자들에게 연구의 자율성을 더 보장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대구경북과기원 신성철 총장, 울산과기대 조무제 총장, 포스텍 김용민 총장, KAIST 서남표 총장, 광주과기원 김영준 총장, 사회를 맡은 중앙일보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포항=프리랜서 공정식]

“과학자들의 연구 활동을 시시콜콜 간섭해서는 창의적인 연구도, 노벨 과학상 타기도 어렵다. 자율성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 “국가 과학자 인증 제도를 도입해 인증받은 사람에게는 정년을 보장하자.” “과학계 비정규직의 계약 기간을 없애거나 길게 늘려 야 한다.” 우리나라 대표적 5개 공과대학 총장들이 위기에 처한 한국 과학을 살리기 위한 처방을 내놓았다. 광주과기원 김영준 총장, 포스텍 김용민 총장, KAIST 서남표 총장, 대구경북과기원 신성철 총장, 울산과기대 조무제 총장이 18일 경북 포항 포스텍에서 열린 좌담회 자리에서다. 본지 박방주 과학전문기자가 좌담을 진행했다.

▶사회=과학자들은 정부의 간섭이 너무 심하다고 불만이 많다.

 ▶김영준=과학자들은 매년 보고서를 내야 하고, 단계마다 평가를 받아야 한다. 물론 교육과학기술부가 올해 1월부터 그런 부담을 줄여주려는 시도(한국형 그랜트제)를 처음 시작하기는 했다. 연구 지원 업무를 하는 16개 전 정부 부처로 더 확대돼야 한다. 이제 정부도 과학자들을 믿고 맡겨도 될 때다.

 ▶김용민=미국 국립보건원의 연구 과제 최종 보고서는 한두 장이면 족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연구비를 준 뒤 믿지 못해 중간에 체크하고, 연구 제안서대로 하는지를 보기 때문에 창의적인 연구를 하기 어렵다. 정부와 과학자 간 불신의 벽이 높은 것이 원인인데 서로 풀어야 할 숙제다.

 ▶서남표=연구 과제를 선정할 때 잘해야지, 연구비를 준 뒤 평가만 까다롭게 하면 뭐하나. 내가 미국 과학재단 부총재 시절 맨 처음 없앤 것이 두꺼운 보고서를 받는 구태였다.

 ▶사회=연구 자율성을 높이려면 어느 기관이 나서야 하나.

 ▶조무제=연구 지원 업무를 하는 정부 부처가 많은데 서로 연구비 관리 규정이나 그 문화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국가 연구개발 컨트롤타워인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제도 개선이나 문화를 새로 만드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

 ▶신성철=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그런 측면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다른 나라가 하지 않는 장기 연구 과제를 기획하는 데도 힘을 쏟아야 한다. 그게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길이다. 정부 주도보다는 민간 주도가 더 좋다.

 ▶사회=우수 청소년의 이공계 기피가 여전히 심각한데.

 ▶신성철=청소년의 이공계 진학에서 양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질이 문제다. 그 대책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대통령이 ‘과학자가 국가 자산’이라고 생각하고 나서야 풀린다. 남북 대치 상황인데도 1970년대 KAIST 설립 당시 학생들에게 전원 병역특례를 준 것도 대통령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둘째는 직업 안정성이다. 회사에 들어간 이공계 출신 상당수는 40대만 되면 퇴출 위기에 몰린다. 과학자 인증 제도를 도입해 기업과 국책연구소에서 정년을 보장해 주도록 해야 한다. 셋째는 이공계 관련 직업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관련 직업이 16.2%, 미국은 32%, 프랑스는 29%다.

 ▶김영준=이공계를 졸업한 뒤의 비전이 분명해야 한다. 젊었을 때 5년 정도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 기간 중 좋은 연구 성과를 내면 성공의 길이 열리게 해야 한다. 그런 기회마저 없는 것이 이공계 기피의 한 원인일 수 있다.

 ▶김용민=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 고교생 중 상위 1%가 아닌 상위 5%를 선발한 뒤 열정을 불어 넣어주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는 등 교육을 잘 시켜 글로벌 리더로 키우면 더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사회=우리나라 이공계 대학 교육이 부실하고, 그게 노벨 과학상을 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는 지적이 많다.

 ▶서남표=대학에서는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 과학에는 노벨 과학상을 탈 수 있는 것이 있고, 수학이나 공학처럼 그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국민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성철=대학에서 전통적인 교재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원리를 배우고, 폭넓은 지식을 습득하도록 해야 한다. 대구경북과기원에서는 2년 전부터 물리·화학 등 각 학과목에서 전통적인 교재를 못 쓰게 했다. 정부가 최근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를 설립하는 등 연구의 물꼬를 응용과학 위주에서 기초과학으로 튼 것은 대단히 잘한 일이다.

 ▶김용민=이공계 학부 교육이 정상화돼야 한다. 연구중심대학의 경우 학부 교육이 연구에 치여 무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연구가 교육을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연구중심대학이다.

 ▶서남표=인터넷 강의를 도입하고, 학교에 와서는 학생들이 서로 토론하도록 했더니 교육 효과가 아주 높아졌다. 수학이나 물리 등 각 과목의 똑 같은 강의 내용을 매번 반복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교수가 필요 없어지는 게 아니다. 토론 리더나 멘토 등으로 그 역할을 달리해야 한다.

 ▶사회=두뇌 유출과 비정규직에 대한 해법은 뭔가.

 ▶김영준=두뇌 유출과 유입이 자유로워져야 한다.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은 우수 이공계 외국인 인재에게 시민권을 주는 등 각종 유인책을 만들어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민법을 개정해 동남아 인재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광주과기원에는 우수한 외국인 학생이 많은데 학업이 끝나면 남고 싶어도 못 남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칼텍)의 교수 80%가 외국인이다.

 ▶조무제=대학 교수를 뽑을 때 국내 ‘토종 박사’ 할당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외국으로 나가지 않고 국내 대학원에 진학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다. 국내 대학원도 살리고 두뇌 유출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는 한 방법이다.

 ▶신성철=대학이나 국책연구소의 비정규직 해법은 운영의 묘를 살리면 될 것 같다. 즉 비정규직을 뽑을 때 정규직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 위주로 뽑아 정규직 전환 희망을 주고, 계약 기간도 없애거나 아주 길게 하면 된다. 지금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처음부터 다른 부류로 인식되고 선발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탐사팀=최준호·고성표·박민제 기자,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미주 중앙일보=정구현(LA)·강이종행(뉴욕)·유승림(워싱턴) 기자, 김보경 정보검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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