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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과 진실 사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88호 30면

얼마 전 수출업을 한다는 60대 후반의 노신사가 서류를 잔뜩 들고 찾아왔다. 거래하던 바이어에게서 상당한 액수의 돈을 떼여 이를 찾을 수 있도록 민사소송을 대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진실하고 신중한 모습에 신뢰가 가서 그의 말을 열심히 들었다. 그러나 서면을 살펴보니 이미 핵심 쟁점에 관한 다른 소송에서 패소 판결을 받은 게 확정돼 승소 가능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부하로 있던 사람이 배신하여 거짓말을 해서 진 것이라며 그 판결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돈이 아니라, 사건의 진실이 문제라면서 이를 밝히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하였다.

고뇌에 찬 그의 얼굴을 보면서 오래전 형사재판을 하면서 만났던 사람이 생각났다. 자신의 딸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피고인에 관해 법정 증언을 하였던 사람이었다. 그 사건에서는 장기간의 심리 끝에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는데 며칠 뒤 그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그는 법정에서 증언하는 동안 분노를 애써 참고 침착한 태도를 보여서 인상적이었다. 그는 명백한 범인에 대한 무죄 판결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며 만약 판결이 확정된다면 법이 무너진 이 나라를 떠나겠다는 것이었다. 재판장인 나 역시 마음이 무거웠다. 피고인이 범인이라는 심증이 강하게 들어서 여러 가지 증거 조사를 하며 애를 썼지만 증거 부족으로 결국 내키지 않은 채 무죄 판결을 했던 것이다.

형사재판에서 유죄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정도’의 엄격한 증명이 필요하다. 그 증명의 정도는 상당히 높아서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으면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다. 위 사건은 증명 기준에 이르지 못하여 무죄가 불가피했지만, 딸과 피고인의 관계를 잘 알고 있던 아버지로서는 유죄에 관한 확신이 있었을 것이고, 위 판결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민사재판에서도 비슷한 일이 생긴다. 직장에서 같이 근무하던 두 남녀 사이에 벌어진 소송이 있었다. 여자가 남자를 상대로 성폭행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자, 남자는 여자가 거짓 소문을 퍼뜨려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역시 손해배상 청구를 했다. 재판을 거듭해도 어느 쪽 주장이 사실인지 알 수 없었다. 민사재판에서는 자기 주장에 관한 증거를 내지 못하면 지게 되는데 이를 ‘입증책임’이라고 부른다. 두 사람 모두 입증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각각 패소 판결을 선고했다. 이 판결은 명백히 상식에 어긋난다. 성폭행 사실이 있든 없든, 진실은 하나일 텐데 두 청구를 모두 기각함으로써 여자에게는 성폭행 사실을 부정한 셈이 되고, 남자에게는 이를 인정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판결 사실과 실제의 진실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재판의 1차 목적은 증거에 의하여 진실을 찾는 것이지만, 앞의 경우처럼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재판에서 규정된 소송 절차와 엄격한 증거법칙을 어기면 아무리 진실을 주장하더라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재판에서의 진실 발견은 개인의 존엄과 같은 기본권 등을 보장하기 위한 보다 높은 가치에 길을 비켜주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피고인의 묵비권이나 무죄추정원칙은 진실 발견에 장애가 되는 면이 있지만, 인권 보장을 위하여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원칙들이다. 어떤 사건에서 너무나 억울하여 진실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증거법칙을 무시하면 잇따라 다른 사건에서도 무고한 피고인들을 유죄로 인정할 위험성이 높아져 피해가 훨씬 더 커지게 된다.

법관은 이러한 재판 원칙 안에서 진실을 찾기 위하여 애를 쓰지만 벽에 부닥치는 때가 종종 생긴다. 특히 피해자가 증거를 제대로 내지 못해 재판에서 불리해지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이런 사람은 원래 입은 피해에다 소송에서 패소한 억울함까지 더하여 견디기 힘들 것이다.

결국 제도적 불완전함과 증거 부족 등의 이유로 판결상 사실과 실제 진실 사이에 차이가 나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 이는 법과 재판제도의 한계인 셈이다. 이런 이유로 재판 경험이 쌓일수록 법과 재판제도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 절감하게 된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사는 세상인 만큼,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재판과 법도 불완전함을 면하기 어렵다고 할까.

그러나 이런 설명이 편지를 보냈던 아버지나 나를 찾아온 노신사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이해하기 어려운 삶의 불행과 불공평함은 신(神)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고 낮게 고백할 수밖에 없다.



윤재윤 춘천지방법원장을 마지막으로 30여 년간의 법관생활을 마쳤다. 철우언론법상을 받았으며, 수필집 『우는 사람과 함께 울라』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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