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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피에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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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피에타(Pieta)’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자비·연민을 뜻한다.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 때 바치는 ‘자비송’의 후렴구 “자비를 베푸소서”의 원어이기도 하다. 미술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비탄에 잠겨 있는 이미지를 가리킨다. 인천가톨릭대 정수경(미술사) 교수는 “성경에 직접적으로 언급된 장면이 아닌데도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인간으로서의 성모의 모습은 고통·자비·연민·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테마여서 즐겨 사용됐다”고 설명했다.

 여러 ‘피에타’ 중 대표작은 성베드로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것(1499년)이다. 예수보다도 앳돼 보이는 성모 마리아의 선 고운 콧날, 하늘을 향해 벌린 손바닥. 그 궁극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소리 없는 울음이 된다. 내 몸을 빌려 태어난, 나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 동정녀 마리아에게 예수는 곧 스스로를 존재하게 만드는, 삶의 이유다. 그러니 이 비탄은 ‘나’를 잃은 데서도 비롯한다. 이 점이 현대 예술이 계속해서 피에타를 불러내는 이유일 것이다.

 영화 ‘피에타’의 포스터도 그렇다. 영화 에는 없는 장면이다. ‘모성을 통한 속죄와 구원에의 갈구’라는 메시지를 미켈란젤로의 이미지를 빌려 한 장의 포스터에 담았다. 영화의 무대는 근대 산업 공간인 청계천의 소규모 공장들. 몸을 먹여 살리던 철공 기계에 몸을 잘려야 하는 군상들이 이 시대의 비탄을 증언한다. 주인공은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속죄하지만 달라질 것은 없다. 사회 하부의 부속품에 불과한 그를 대신해 또 다른 인물이 빚을 받겠다며 남의 몸을 자르고 다닐 것이고, 그래서 세상은 여전히 비정할 것이다. 속죄는 있되 구원은 없다.

 여기 또 다른 현대적 피에타가 있다.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 미술전 한국관에 나왔다. 이용백(46)의 거푸집 작업 ‘피에타-자기 죽음’이었다. 거푸집이 제 몸에서 나온 알맹이 조각을 안고 있는 모습이다. 흰 사이보그 같은 거푸집이 생살의 빛깔인 분홍색 알맹이를 응시하고 있다. 나의 시신을 안고 있는 또 다른 나, ‘자기 죽음’의 피에타다. 대리석인데도 사람보다 아름답게 표현됐던 미켈란젤로의 마리아와 달리 이용백의 마리아는 무심하다. 소중한 것을 잃은 표정이 아니다. 불쌍한 이들끼리의 연민이 드러나는 영화 ‘피에타’와도 다르다. 이용백의 피에타는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다. 나에게만 몰입하는 또 다른 나, 이용백의 거푸집은, 상실할 그 무엇도 없는 현대인이다. 비정한 피에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