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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세율거품 있나 없나

중앙일보

입력

영국 속담에서는 세금을 거두는 국세청의 세리(稅吏) 와 세금을 내야 하는 납세자의 관계를 '의처증이 심한 남편' 과 '바람기 있는 아내' 로 비유한다.

세금을 조금이라도 더 거두려는 국세청과 한푼이라도 덜 내려는 납세자의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같은 신경전에서 최근 우리 국세청의 손을 번쩍 들어준 일등공신은 신용카드다.

소비자가 신용카드로 대금을 치르면 세원(稅源) 이 유리알처럼 드러나기 때문에 국세청으로선 세금을 자동으로 거둬들이는 효자를 가진 셈이다.

신용카드 사용이 활성화할수록 아내(납세자) 의 '바람기' 는 남편의 '의처증' 앞에서 맥을 못추는 현상이 심해진다.

이런 영향인지 지난달 29일 국무회의에서 심의.의결한 '2000년 회계연도 정부결산' 을 보면 세금이 당초 예상보다 16.6%(13조2천3백18억원) 나 더 걷힌 것으로 나타났다.

세금이 늘어난 데는 여러 요인이 있다. 기업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 때문일 수도 있다. 경기가 안좋다고 하지만 삼성전자.현대자동차처럼 장사를 잘 한 기업들이 세금을 더 냈을 수 있다.

신용카드의 역할은 더 크다. 세금을 매기는 기준(과세표준) 이 대중음식점은 30~40%나 오르고, 소매업소는 20~30% 높아진 것으로 세무당국이 파악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지난해 신용카드 사용액은 줄잡아 78조원으로 전년(38조원) 의 두배를 넘었다. 신용카드 사용만 놓고 보면 경기침체라는 얘기가 무색할 정도다.

그러나 신용카드 세수(稅收) 가 갑자기 늘면 우리 경제가 또다른 골칫거리를 떠안을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서울 신림동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는 金씨 아줌마의 경우 음식값을 언제 올려야 할지 고민이다. 손님이 서너명만 되면 1인분에 4천원짜리 점심을 먹고도 대부분 신용카드를 들이밀기 때문이다.

하루 매상 1백만원 가운데 신용카드 비중이 70~80%나 된다. 한해 전만 해도 이 비율은 40%도 안됐다.

그러다 보니 세금이 다락같이 올랐다. 종전에는 부가가치세를 내는 기간인 한 분기 매출액을 4천5백만원 정도로 신고했다.

여기에 부가세율 10%를 적용해 세금을 계산하고 이런 저런 공제를 하면 3백60여만원을 세금으로 냈다.

그러나 올들어 신용카드 매상이 7천만원이나 되면서 부가세가 6백만원을 넘자 金씨는 "음식값을 올리는 수밖에 없다" 고 한숨 짓는다.

국세청은 신용카드 사용을 더욱 촉진할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신이 났다. 신용카드 복권 당첨금과 당첨자를 대폭 늘리고 1등 당첨금(1억원) 을 높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단다.

신용카드 사용을 활성화하면 과세표준이 투명해져 세금이 많이 걷힌다는 발상이다. 불경기에는 세금이 덜 걷히게 마련이고 세무조사도 덜 하는 게 상식인 점에 비추면 의외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세금을 빼먹던 사람에게 세금을 더 물렸다며 '조세정의를 살렸다' 고 마냥 우쭐댈 일만은 아니다.

지금의 세율은 납세자가 응당 세금을 빼먹을 것이라고 생각해 현실보다 다소 높게 정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신용카드 때문에 국민의 조세부담률이 높아지고 있다면 세율의 거품을 빼는 일에도 이제는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신용카드를 열심히 쓴 소비자가 나중에 인상된 점심값으로 뒤통수를 맞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종태 산업부 차장 ijot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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