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국책사업…] 4. 오락가락 설계… 엉터리 감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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잦은 설계 변경과 공사기간 연장은 예산 낭비의 주요 원인이다. 여기에 엉터리 감리까지 가세하면 사업은 부실공사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1992년 착공 후 2백32차례 설계가 변경된 경부고속철도 사업은 설계 변경 건수에 있어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처음 해보는 사업인 데다 지형이 험하다 보니 불가피했던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처럼 잦은 설계 변경은 공기 연장(당초 98년→2010년 완공)과 사업비 증가(5조8천4백62억원→18조4천3백58억원)의 결정적 요인이 됐다.

대전.대구 역사의 경우 지하 노선으로 설계가 70% 이상 완성된 상태에서 93년 6월 지상 노선으로 바뀌었고, 지상 노선의 설계가 50% 진행된 상태에서 다시 지하로 바뀌었다.

경기도 화성군 상리터널은 현재 FRP라는 플라스틱으로 입구가 봉인돼 있다. 2천2백m로 예정됐던 이 터널은 95~96년에 2백98m를 뚫은 상태에서 공사가 중단됐다. 터널 밑에 있는 폐광이 안전성에 문제가 있다는 여론이 들끓자 결국 1백17억원의 헛돈만 날리고 우회 노선을 택한 것이다.

95~98년에 진행된 2백18건의 도로.하천.공항 공사를 분석한 건설교통부 자료에 따르면 공사당 설계 변경이 평균 4.2회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공사비는 당초 계획보다 평균 43% 늘었다.

한경대 이원희(행정학과)교수에 따르면 건교부 산하 철도청.수자원공사.도로공사.토지공사 등 6개 기관의 99년 주요 사업에서 기술적 설계 변경만으로 당초 사업비보다 3조2천억원의 예산이 낭비됐다.

중앙대 김수삼(건설환경공학과)교수는 "설계 변경에 따른 시공 단계에서의 낭비 요인을 줄이기 위해 기본설계 비중을 현재의 30%선에서 50% 정도로 끌어올려야 한다" 고 말했다.

◇ 국가 정보 사업에 무더기로 투입된 실업예산=지하 시설물 측량 전문업체인 A사는 99년 한 해 동안 경기도 고양시의 상.하수도관 매설지도를 만들었다. 매설지도 작업은 1조3천억원이 드는 국가지리정보체계(NGIS)사업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 회사가 정부 예산 11억원을 받아 만든 이 지도는 대한측량협회가 심사한 결과 현장 적합률이 34%에 그친 것으로 판정났다. NGIS 민간 지정업자인 이 회사는 울며 겨자먹기로 자기 돈을 들여 지난해부터 여지껏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고 있다.

지하 탐사 작업이 이처럼 엉망이 된 이유는 정부의 무신경한 예산정책 때문이다. 정부는 외환 위기의 실업자 구제정책 일환으로 지하 매설물 작업을 공공근로 예산사업으로 분류했다. 이에 따라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이 사업비의 60%는 무조건 실업자 인건비에 들어가야 했고, 업체는 실업자를 무더기로 고용해 지하 탐사 작업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98년부터 2년간 이런 식으로 진행된 지하 시설물 탐사 작업에 들어간 예산은 5백91억원. 37개 지역의 탐사 작업 중 18개 작업이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 부실 시공과 부실 감리=국회 건교위 소속 도종이 의원은 지난달 30일 낸 경부고속철 백서에서 "공사가 착공된 92년 6월부터 1년간 우리나라엔 아예 책임감리제도가 없어 발주처인 고속철관리공단 직원이 자체적으로 감독한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있었다" 고 지적했다.

시화호 사업이 진행 중이던 96년엔 호수로 통하는 우수관(빗물이 흘러들어가는 관)에 오수관(폐수를 처리하는 관)을 잘못 연결한 사실이 감사원에 의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96년부터 들어간 수질개선 관련 예산은 2006년까지 4천8백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 민자 유치 계획 현실적으로 세워야=96년 해양수산부는 민자 유치로 올해까지 1백37선석의 항만을 건설하겠다고 했으나 현재 실적은 22선석에 불과하다. 민자 유치 조건이 기업에 너무 불리해 신청 업체가 적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해양부는 당초 민자로 건설하려던 인천 북항.울산 신항.보령 신항.새만금 신항 등을 재정투자 사업으로 전환할 방침이다.

해양부 관계자는 "민자 유치 조건을 완화해 주면 특혜시비가 있고 현행대로 유지하자니 신청 업체가 없어 고민" 이라고 털어 놓았다.

삼성경제연구소의 박용규 수석연구원은 "부산 신항만 건설 등 현재 96개 민자 유치 사업이 공사 중단 등의 차질을 빚고 있으며, 정부 주도로 진행되는 민자 유치 결정 과정이 차질의 주요 요인" 이라고 지적했다. 민간 사업자에 대한 수입 부족 보상책 등 합리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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