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필요한 건 대공황 때 루스벨트의 과감한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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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왼쪽에서 둘째)이 민주당 전당대회 마지막 날인 6일 밤 대선 후보 수락연설을 마친 뒤 부인 미셸(왼쪽)과 작은 딸 사샤를 끌어안고 있다. 오른쪽은 큰 딸 말리아. [샬럿 로이터=뉴시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모습은 ‘변화’와 ‘희망’을 미국 국민에게 말했던 4년 전과 달랐다. 어느덧 머리는 희끗희끗해지고 카랑카랑했던 목소리에는 중년의 저음이 섞였다. 하지만 지지자들을 열광시키는 연설 솜씨는 그대로였다.

 오바마 대통령이 “나는 미국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합니다”라고 선언하자 기다렸다는 듯 전당대회장인 샬럿의 타임워너 케이블 아레나를 가득 메운 2만여 명의 민주당원은 일제히 “4년 더(Four more years)”를 외치며 기립박수를 보냈다.

 6일 밤(현지시간) 오바마의 후보 수락 연설은 경제·교육·외교 등의 순서로 흘렀다. 맨 먼저 ‘선택’을 강조했다. 그는 “지금은 한 세대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라고 전제했다. “이번 선거에서 기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비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으로 몇 년간 미국에서는 일자리와 경제, 세금과 재정적자, 에너지와 교육, 전쟁과 평화에 대한 중요한 결정이 이뤄질 것”이라며 “이 결정은 다가올 수십 년간 우리와 자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책 중 선택하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선택에 한 세대에 걸친 미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듣기에 따라선 엄포와도 같은 얘기였다.

 그런 엄포는 계속됐다. “4년 전 변화를 원한 건 바로 여러분이었다. 변화를 만든 것도 여러분이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미래를 선택해야 한다.”

 선택을 위해 오바마가 강조한 건 ‘시민정신(citizenship)’이었다. 그는 “여러분만이 미국을 전진시킬 수 있다”며 “나는 희망을 갖는다. 그 이유는 여러분 때문”이라고 했다. 50년 전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이 남긴 “국가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라”는 연설을 연상케 했다. 지지자들은 “유에스에이(USA)”와 “4년 더”를 연호하며 오바마를 응원했다.

 오바마는 “내가 제시하는 길이 빠르거나 쉽다고 얘기하지는 않겠다. 그런 길을 갖고 있지도 않다”며 “도전을 해결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지금의 위기보다 유일하게 나빴던 시절인 1930년대 대공황 때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과감하고 끈기 있게 추진했던 실험이 필요하다고도 역설했다.

 공화당의 밋 롬니 후보에 대한 공격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린) 탬파의 친구들은 소수의 부자들을 위해 세금을 깎아주겠다고 한다”며 “그 약속은 이미 30년 동안 겪어본 것”이라고 말했다.

 40분간의 연설을 끝내며 오바마는 “나는 그냥 후보가 아니다. 나는 대통령”이라며 “오늘 밤 나는 여러분의 표를 요청한다”고 말했다. 청중석에서 “대통령을 사랑한다”는 외침이 이어졌다.

 오바마의 연설에서 ‘한국’이나 ‘북한’은 언급되지 않았다. 외교 분야를 언급하며 그는 롬니와 폴 라이언 공화당 부통령 후보를 “외교의 신참”이라고 깎아내렸다. 그 예로 중국에 지나치게 부정적이란 점을 꼬집었다.

 CNN은 “오바마는 훌륭한 웅변가였지만 위대한 소통자는 아니었다”며 “편을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했다. 하지만 트위터 공간에선 열기가 뜨거웠다. 연설하는 동안 오바마의 트위터 계정(@barackobama)은 분당 5만2757건의 트윗을 기록했다. 지난달 30일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롬니가 기록한 분당 1만4000건의 네 배 가까운 수치였다.

 민주당 전당대회 마지막 날인 이날 대회장에는 지난해 1월 애리조나주 총기 난사 사건 때 머리에 총상을 입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개브리엘 기퍼즈(42) 전 연방 하원의원이 등장했다. 기퍼즈 전 의원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국기에 대한 맹세를 낭독했고 일부 청중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민주당 전당대회를 끝으로 2주일에 걸쳐 치러진 민주·공화 양당의 후보 선출 절차는 모두 마무리됐다. 오바마와 롬니 두 후보는 다음 달 3일 덴버에서 열리는 첫 토론에서 격돌한다. 이 토론의 결과가 대선의 분수령이다. 11월 6일까지 60일도 채 남기지 않은 미 대선은 점점 더 거친 승부로 돌입하게 됐다.

 미 언론은 하나같이 이번 대선을 “역사상 가장 박빙의 승부”라고 예상하고 있다. 오바마가 승리한다면 실업률 8%가 넘는 상황에서 재선에 성공하는 첫 대통령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오바마의 경제 성적표를 공격하는 롬니의 도전은 거세다. 오바마의 수성이 그만큼 녹록지 않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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