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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의 영화 '수취인불명'

중앙일보

입력

일본영화 감독 중에 와카마츠 코지라는 인물이 있다. 1960년대 이후 일본에서 연출활동을 했으며 당시 '문제감독' 일순위로 오르곤 했던 사람이다.

와카마츠 코지 감독에 대한 일본평단이나 지식인 사회의 경멸감은 대단했던 것 같다. 그의 영화가 우연하게 해외영화제에 출품되자 일본 내에선 "국가적인 수치"라는 표현까지 흘러나왔을 정도니 말이다.

물론, 영화감독의 작품세계를 거칠게 비교한다거나 영화감독 두 사람을 억지로 동일 선상에 놓으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와카마츠 코지 감독과 김기덕 감독에게서 약간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에 대해 특별하게 교육받은 이력이 없다는 점, 짧은 기간내에 다작의 경향을 보인다는 점, 그리고 이들 모두 사회에 대한 격렬한 증오심을 영화의 출발점으로 한다는 것이다. 두 감독이 지식인 사회로부터 격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점도 흡사하다. 태생부터 비주류인 감독이기 때문이다.

김기덕 감독은 출발부터 주목받는 감독은 아니었다. 저예산 영화 '악어'와 '야생동물보호구역'은 일부 소수의 관객으로부터 찬사를 받은 정도였다.

전혀 다른 환경에 속한, 서로를 경멸하지만 그럼에도 심정적으로 '의지'하는 여성들의 교류를 그린 '파란대문'은 뛰어난 수작임에도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어쩌면 영화 '섬'은 주류사회의 냉대 혹은 무관심의 벽을 향한 연출자의 '주먹' 한방과도 같은 작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파편적이고 충격적인 이미지를 지닌 '섬'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중 도발적인 작품이라고 할만하다. 그리고 '수취인불명'으로 이어진다.

감독의 시선은 이제 기존의 다듬어지지 않은 원초적인 것에 대한 동경에서 한국 사회의 폭력의 근원을 파헤치려는 것으로 향하는 것 같다.

김기덕 감독 자신도 이 영화에 대해 "세대를 넘어 거듭되는 폭력, 그것이 가장 한국적인 잔인함 아닌가"라고 스스로 질문했다.

다시 말해서 '수취인불명'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 중에서 명료하고, 예리하게 연출자의 영화적 입지점을 재확인한 작품이다.

'수취인불명'은 여느 김기덕 감독의 영화처럼 주변부 인생의 이야기다. 아니, 연출자의 견해에 따르면 주변인이자 중심부에 위치한 어느 인물들이 등장한다.

1970년대의 한 마을, 흑인 혼혈아 창국을 낳은 여인은 마을 밖 버스에서 생활한다.

여인은 창국 아버지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지만 번번이 편지는 되돌아온다.

수취인불명으로 보낸 편지가 반송되는 것. 창국은 개장수를 도와 생활을 돕는다.

어린 시절 눈을 다친 은옥은 눈을 고쳐주겠다는 미군 병사와 살림을 차린다.

지흠은 은옥을 몰래 짝사랑하고 있다.

한편, 나약한 청년 지흠의 아버지는 전쟁때 입은 상처로 다리를 못쓰지만 활쏘기로 시간을 보낸다.

'수취인불명'은 김기덕 감독에게 한가지를 약속한다.

그는 최근 한국영화에서 가장 시적이면서 상징적인 이미지를 능란하게 창조할 수 있는 연출자임에 분명하다.

이 영화는 특정한 시기, 특수한 공간을 내세우면서 한국의 역사와 그 안에서 살고있는 굴절된 인생을 하나씩 펼쳐보인다.

사실 이러한 접근법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어찌보면 여느 소설이나 TV시리즈에서 드물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기덕 감독은 '수취인불명'에서 회화적 이미지를 전면에 배치하면서 현대사의 암울함을 통과하는, 인물군상을 등장시킨다.

영화는 한 여인과 혼혈아, 그리고 시대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의 에피소드를 겹겹이 쌓으면서 결국 탈출구없는 그들 삶을 과묵하게 지켜본다.

'수취인불명'은 이전까지의 감독 영화보다 세련되고 우회적인 표현법을 택한 영화이지만 감독이 관객에게 대화를 청하는 방식은 보다 직설적이다.

이제 김기덕 감독은 연출자로서의 비주류적인 정체성을 자각하고, 그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하는 방식에 스스로 눈을 뜬 것 같다.

'수취인불명'은 그런 점에서 감독 작품세계의 진정한 출발점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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