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영화낚시] '엑소시스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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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는, 그것이 잘된 영화든 아니든, 관객을 향해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공포영화는 그 질문을 두 시간 분량으로 늘려놓은 것이다.

그 질문은 다름 아닌, "무섭지?" 이다. 영화는 묻고 또 묻는다. 무섭지?

관객도 나름대로 대답을 내놓는다. "하나도 안 무섭다" 일 수도 있고 "정말 무섭다" 일 수도 있다. 관객들은 "정말 무섭다" 는 대답을 하기 위해 돈을 내고 극장에 오는 것이다.

돈을 내고 극장으로 들어오는 관객들도 무섭다. 이 무서운 관객들을 무서움에 떨게 하려면 무서울 정도의 치밀한 계산과 재능이 필요하다.

공포영화는 관객을 향해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훨씬 대답하기 어렵다. "도대체 뭐가 무서워□" 라는 질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인간이 언제 어디에서 무엇으로부터 공포를 느끼는가에 대한 것이다.

호랑이가 물어간다는 얘기는 이제 더 이상 공포가 아니다. 공포영화 제작자들은 "도대체 뭐가 무섭냐" 는 질문을 붙잡고 씨름한다. 이들은 악령.정신질환자.연쇄살인범.파시스트 등의 인물을 찾아내고 이들이 움직일 만한 활동무대와 상황을 고안해낸다.

관객도 나름대로 이 질문에 대답한다. "그 연쇄 살인범 눈빛 봤어□ 너무 무섭지 않냐□" 혹은 "아, 이제 외계인은 더 이상 안 무서워" 따위.

윌리엄 프레드킨 감독이 28년만에 새로 편집한 '엑소시스트' 를 보고 나온 관객들도 위의 두 질문을 피해갈 수 없다.

무섭냐는 질문에 아마 많은 관객은 고개를 저을 것이다. "생각보다 안 무서운데요. " 그럴 수밖에. 그 영화가 만들어진 1970년대의 미국으로부터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공포는 공감에서 오는 것이다.

다음 질문, 그럼 도대체 뭐가 무서운 거지□ 아니, 도대체 뭐가 그렇게 무서웠던 거지□ 이렇게 과거의 공포를 향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영화는 단순한 공포영화에서 시대적 맥락을 반영하는 사회적 텍스트로 변모한다.

이 영화의 공포는 악령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화는 끈질기게 '아버지' 의 부재를 문제 삼고 있다. 남편과 이혼한 후, 혼자 딸을 키우는 여배우의 집에 악령이 찾아든다.

남부러울 게 없는 집에서 사춘기에 접어든 딸은 아버지를 찾지만 그 결핍은 채워지지 않는다.

결국 아버지를 대신하여 악령이 귀여운 딸을 찾아온다. 이 가족의 문제는 신부(Father) 들이 진짜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에 들어옴으로써 비로소 해결된다. 이 영화는 급격한 가족해체가 진행 중이던 70년대 미국사회 중산층의 정서에 기대고 있다.

그러니 아버지의 부재가 일상화한 요즘 2000년대에 그 영화가 더 이상 무서울 리 없다.

그러나 "도대체 뭐가 무서운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엑소시스트' 의 태도는 경탄스러울 정도로 진지하고 치밀하다. 좋은 영화는 대답 대신 질문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엑소시스트' 는 명성에 값한다. 더 이상 무섭지는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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