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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위에 태평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86호 30면

뉴스를 보고 나는 불안했다. 일본 오키나와 북동쪽 해상에서 시속 20㎞의 속도로 북상 중인 제15호 태풍 볼라벤은 현재 중심기압 920헥토파스칼(hPa)에 강풍 반경은 550㎞인 대형 태풍으로 발달했다고 한다. 바람이 초속 25m를 넘으면 지붕 기왓장이 뜯겨 날아가고, 40m가 넘는 강풍은 사람은 물론 바위까지 날릴 정도로 위협적이라는데 볼라벤의 순간 최대풍속은 무려 초속 53m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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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의 태풍 ‘곤파스’가 떠올랐다. 그날 나는 세상의 종말을 보는 것 같았다. 태풍은 무시무시한 괴물 같았다. 나는 태풍의 손이 가로수들을 뽑고 아파트 유리창을 마구 깨뜨리고 옥상 지붕의 기왓장을 두둑 뜯어내는 것을 보았다. 상점의 간판들이 마치 비닐봉지처럼 하늘을 날아다니고, 뜯겨진 창틀이 맞은편 아파트의 베란다로 날아가 유리창을 박살내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날 나는 곤파스의 행패를 트위터에 이렇게 기록했다. 새벽 4시 그가 문을 두들겼다. 문 좀 열어 봐. 할 말이 있어. 내가 잘못했어. 좀 열어 봐.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정말 안 열 거야? 다 죽여버릴 거야. 엉엉. 그는 울었다.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이제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 게. 그러니까 제발 문 좀 열어보라고. 6시 나는 문을 열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닥치는 대로 집안의 물건을 부수고 나를 때렸다. 내 머리채를 잡아 끌고 밖으로 나갔다. 태풍 곤파스는.

그 곤파스보다 더 강력한 태풍이 곧 덮친다는데 하늘은 맑고 고요하다. 평화는 어딘지 비현실적이다. 불길하다. 대체 어떤 무시무시한 재해가 오려고 이렇듯 하늘은 높고 아득한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고 공포는 불안을 잠식한다. 공포는 상상 속에서 거대해진다. 체험한 기억을 증폭시키면서 그것을 극단까지 왜곡·과장하는 상상 속에서 공포는 어마어마해진다.

나는 TV를 끄고 괴테의 『마왕』을 찾아 읽는다. 이런 밤이 아니면 괴테의 『마왕』을 언제 읽는단 말인가. “아버지, 아버지에겐 마왕이 안 보이나요?/ 왕관을 쓰고 망토를 두른 마왕요./ 아들아, 그건 그저 엷게 퍼져 있는 안개란다.” 나는 또 읽는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저 소리가 들리지 않으세요?/ 마왕이 제게 나직이 속삭이는 소리가?/ 진정하거라, 아가야. 걱정말아라./ 단지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란다.”

재작년 곤파스 때 태풍도 무서웠지만 더 무서웠던 것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아슬아슬한 묵시론적 재난을 지나 겨우 회사로 출근했는데 그런 나의 흥분과는 달리 사람들은 어제와 똑같은 표정과 자세로 성실하게 일하고 있었다. 태풍이 불든지, 자동차가 날아다니든지, 세상에 종말이 오든지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체크하고 전화를 거는 사람들의 표정과 자세가 나는 무서웠다.

창문이 흔들린다. 문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길게 운다. 아내는 잠들었다. 나는 아내의 귀에 속삭인다. “여보, 여보, 나의 아내여, 당신에겐 ‘볼라벤’이 보이지 않나요? 저 라오스의 고원에서 불어오는 무시무시한 바람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아내는 손가락으로 귀를 한번 후비더니 여전히 태평하게 잔다. 아내의 태평은 태풍보다 강하다. 다시 TV를 켠다. 태풍 ‘볼라벤’이 내일 오전 서해로 진입할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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