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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속, 문명과 원시성 사이의 갈등 '간장선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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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는 항상 끈적하다. 항상 일본 사회의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하면서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를 스크린에 뿌려놓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엔 날 것 그대로의 인간 욕망이 가감없이 담겨있곤 한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1950년대 말엽부터 연출생활을 시작했지만 해외에선 198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거장으로 인정받았다. 비슷한 연배의 감독들이 잠깐동안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가 단명한 이들이 많았던 것에 비해, 이마무라 감독은 꾸준하게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지켜온 셈이다. 기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는 지극히 생물학적 원리에 충실한 것처럼 보인다. 삶과 욕망, 그리고 원초적인 생명력을 강조하는 것이 이마무라 감독 영화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간장선생'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1997년에 만든 영화로 칸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작품이다.

'간장선생'은 한편의 희극처럼 보인다. 2차 세계대전 중의 일본. 어촌마을에서 한 남자가 열심히 뛰어다닌다. 이른바 간장선생이라 불리는 그는 모든 환자를 간염이라 진단하며 다닌다. 주변에선 그를 돌팔이 의사라고 수근거리지만 본인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 매춘부였던 소노코는 병원에서 간장선생의 일을 돕게 된다. 소노코는 점차 간장선생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되고 병원은 더욱 활기를 띄게 된다. 한편, 아들 이치로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간장선생은 낙심한다. 그렇지만 더욱 간염연구에 전념하겠다고 결심한다. 현미경을 손에 넣자 간장선생의 연구는 좀더 간염의 본질에 가깝게 다가가게 된다.

"내가 영화를 만든 동기는 단순하다. 내 아버지는 영화 주인공과 비슷한 시골의사였다. 난 약10여년 전부터 아버지 같은 사람을 그리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이마무라 감독은 '간장선생'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영화를 보면 일견 동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간장선생'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인물들이다. 의사와 매춘부, 그리고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들이다. 그런데 약간 과장된 점이 있다. 간장선생이라는 인물이 모든 환자들에게 "당신은 간염"이라고 진단하는 것도 그렇고, 전쟁 당시 일본군인이나 공무원들이 변태적인 행위를 일삼거나 장부 조작하는 등의 행동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간장선생'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민감한 소재를 다루면서, 당시 일본인들의 아둔한 행동양태를 은근슬쩍 비판하고 있다. 영화에서 그나마 긍정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것은 매춘부인 소노코 정도다. 그녀는 헌신적으로 간장선생의 연구를 돕고, 약간 머리가 모자라긴 하지만 남자들에게 육체적 안락함을 제공하곤 한다. 늘상 생명력 넘치는 일본 여성에게서 구원의 이미지를 찾곤 했던 이마무라 쇼헤이감독의 특징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감독은 "영화 속 여인들은 내가 현실에서 경험한 여성들과 비슷하다. 내 주변 여성들은 순응적이거나 나약하지 않다. 난 그리고 매춘부와 호스티스 같은 여성들에게서 인간의 존엄성을 배웠다"라고 말한다.

'간장선생'은 이마무라 감독의 전작 '검은 비'를 연상케한다. 2차대전 중 원자폭탄에 피해입은 일본인들 이야기를 블랙 유머라는 장치로 설명했던 '검은 비'와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마무라 감독은 기존 일본의 영화감독들이 꺼리는 부분, 즉 세계대전 와중의 일본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영화를 보면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다른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영화처럼 '간장선생'엔 성과 속, 그리고 문명과 원시성 사이의 갈등이라는 특유의 문제의식이 살아있지만 '간장선생'은 웃기엔 심각하고, 진지하기엔 가벼운 감이 있다. 다시 말해서 세계대전 중의 일본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의 기운이 살아있으되, 지나치게 희회화한 부분이 있다는 의미다. '나라야마 부시코'나 '우나기' 등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생명의 원초적 기운에 대한 감독 특유의 시선을 담기엔 영화 주제가 다소 무겁다. 이모토 아키라, 아소 구미코 등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가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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