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400주년 화장품 브랜드 ‘산타마리아노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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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치나 프로푸모 파르마체우티카 디 산타 마리아 노벨라(Officina Profumo Parmaceutica di Santa Maria Novella)’. ‘산타 마리아 노벨라에 있는 화장품 가게 겸 약국’이란 뜻의 이 브랜드가 올해로 창립 400주년을 맞았다. 이탈리아 중부 피렌체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약국 문을 연 게 1612년. 400년 세월 이어져온 이 브랜드 화장품은 요즘 ‘산타마리아노벨라’로 줄여 불린다. 우리나라엔 3년 전 처음 소개됐다. 국내 언론으론 처음으로 ‘산타마리아노벨라’ 작업장을 찾아 400년 역사의 어제와 오늘을 둘러봤다. 이 회사의 대표 에우제니오 알펜데리(64·사진)가 함께했다.

이탈리아 피렌체 중심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부속 건물에 있는 ‘산타마리아노벨라’ 매장. 1612년 ‘산타마리아노벨라’가 일반인을 상대로 약국 영업을 시작한 곳이다.
진열장엔 지난 400년 동안 판매된 상품, 약통, 제약용 절구 등이 그대로 전시돼 있다.

피렌체 중심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은 13세기 도미닉 수도회의 교회로 지어졌다. 성당 내부의 프레스코화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 수도사들은 자신들이 사용할 약품을 자급했다. 교회 정원에서 키운 허브와 꽃을 원료로 해 연고·향유 등을 만들었다. 일부는 시장에 내다팔아 수도원 살림에 보탰다. 수도원 내부 약제실은 1612년 정식 ‘약국’ 허가를 받았다. 당시 피렌체를 지배하던 페르난도 디 메디치 1세로부터 일반인을 대상으로 약을 팔아도 좋다는 승인을 얻은 것이다. 화장품 브랜드 ‘산타마리아노벨라’의 공식 역사가 이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유다. ‘산타마리아노벨라’는 성당의 부속 건물에 둥지를 튼 400년 전처럼, 여전히 이곳에서 영업 중이다. 알펜데리 대표는 “400년 동안 영업이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었다”고 했다.

“흑사병이 대유행이던 때처럼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전염병이 창궐하고 아프고 다친 사람이 많이 생기면 약을 찾는 사람이 오히려 늘지 않습니까. 400년간 끊임없이 전통을 이을 수밖에 없었죠.”

수도사들은 한 지역에만 머물지 않고 로마 가톨릭의 명에 따라 유럽 여러 지역으로 옮겨 다녔다. 이런 이유로 도미닉 수도회의 약국 ‘산타마리아노벨라’에서 만든 제품도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요즘처럼 ‘입소문’이 난 덕분인지 각국 왕실과 귀족들도 이 약국 제품을 찾았다.

“메디치 가문의 카테리나 공주가 프랑스의 앙리2세랑 결혼을 했어요. 16세기 ‘산타마리아노벨라’에서 이들의 결혼을 기념해 만든 향수가 ‘아쿠아 델라 레지나’예요. 그걸 공주가 프랑스로 가져갔고 이게 현지에서 유행을 하면서 이때부터 향수가 널리 알려진 거죠.” 향수의 종주국 프랑스 사람들이 들으면 고개를 갸웃거릴 만한 주장이다. “프랑스에서 향수의 더 오랜 기원이라 말할 게 있을지 몰라요. 아무튼 우린 1500년대 만들었던 그대로의 향수 공식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답니다.“ 약제 신부들이 꼼꼼하게 적어 놓은 처방전은 지금까지 생산되는 향수뿐만 아니라 화장수나 피부 진정 작용이 있는 크림 등을 생산할 때 여전히 적용되고 있다고 한다. 알펜데리에 따르면 18세기엔 러시아·인도·중국에까지 ‘산타마리아노벨라’ 제품이 퍼져 나갔다.

수도원이 소유하고 수도사들이 만들던 화장품은 1866년 위기를 겪었다. 당시 이탈리아 정부가 약국을 국유화하려고 한 것이다. 교회와 정부의 갈등 끝에 약국의 운영권은 마지막 수도원장의 조카인 체사레 아우구스토 스테파니에게 이어져 그의 가문에서 운영되고 있다.

1 장미 꽃잎으로 만든 화장수 ‘아쿠아 디 로제’. 2 향낭에 넣은 ‘포푸리’ (꽃이나 과일 등을 말려 만든 방향제) 3 약초나 꽃잎 등 화장품 재료를 보관하는 피렌체 전통 도자기

스테파니 가문이 수도사들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긴 했지만 본격적인 사업 확장은 알펜데리 대표가 합류한 1990년부터 시작됐다. 수도원 공방에 생산 설비를 설치하고 유지·수선하던 알펜데리가 아예 ‘산타마리아노벨라’에 투자를 하고 공동경영자가 된 것이다.

‘산타마리아노벨라’대표

에우제니오 알펜데리

그가 합류한 이후 이 브랜드는 피렌체에 공장을 새로 짓고 설비도 현대화해 전 세계에 지점을 내기 시작했다. 한국을 포함, 영국·프랑스·미국·브라질·대만·일본 등에 지점을 냈다. 수작업 전통을 고수하느라 대량 생산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전 세계 매장은 30여 개뿐이다. “수작업이라고는 하지만 대규모 공장 생산 방식이면 옛날 수도사들이 만들던 제품의 특성이 사라진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지 않다”고 강조한다. “수도사들이 해왔던 것처럼, 최상의 재료로 수공 제작하는 것은 변함없습니다. 현대화된 기계는 사람 손을 대신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중세에도 마찬가지였어요. 장비를 최적화하는 노력일 뿐이죠. 우유비누에 생우유를 넣는 것도 그대로고 포푸리(꽃잎, 말린 과일 등으로 만든 방향제) 원료를 건조할 때도 전통 방식대로입니다.”

알펜데리 대표는 “과거엔 전통 테라코타 항아리에 꽃잎 등을 넣고 석회반죽으로 밀봉한 다음 몇 달씩 발효시켜 만들었는데 지금은 테라코타 항아리 대신 같은 효과를 내는 기계를 사용하는 것만 달라졌을 뿐”이라며 “옛것을 지키면서도 혁신을 하는 게 400년 전통을 제대로 잇는 비결”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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