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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조세형 … '대도<大盜>의 몰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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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 24일 서울 서교동의 단독주택에서 금품을 훔치려다 붙잡힌 조씨가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左). 박종근 기자

▶ 1982년 11월 고위층의 집만 골라 털다 붙잡힌 '대도' 조세형(中). 조씨는 당시 유명인사 집에서 수천만원대의 물방울다이아몬드 등을 훔친 사실이 알려지면서 화제가 됐다. 98년 11월 수감 16년 만에 풀려난 조씨가 청송교도소 앞에서 꽃다발을 들고 웃고 있다(右).

25일 오후 서울 마포경찰서 형사계 사무실. 검은색 점퍼를 머리까지 뒤집어 쓴 초라한 행색의 60대가 160여만원어치의 금품을 훔친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

지난 24일 오후 8시15분쯤 치과의사인 정모(63)씨의 서울 서교동 3층짜리 단독주택 담을 넘어 들어가 손목시계 6개 등을 훔쳐나오다 경찰에 붙잡힌 것이다.

1980년대 고위층과 부유층 인사들을 상대로 한 절도 행각으로 '대도(大盜)'라는 별칭까지 얻었던 조세형(67)씨. 이날 그의 모습은 '좀도둑' 신세에 불과했다.

경찰에 따르면 조씨는 24일 저녁 서교동의 주택가를 돌며 범행 대상을 물색하다 불이 꺼진 집을 발견했다. 그는 마스크를 쓰고 미리 준비한 드라이버로 화장실 창문을 열고 집안으로 침입했다.

그러나 이 집의 경비용 전자감지기가 작동해 곧바로 경비업체 직원과 경찰이 출동했고 조씨는 흉기를 휘두르며 100여m를 달아났다. 경찰은 공포탄을 발사했고, 총소리에 놀라 앞으로 넘어진 조씨에게 수갑을 채웠다.

조씨는 경찰 조사에서 '48세의 노숙자 박○○'이라고 밝혔으나 25일 지문감식에서 신분이 들통났다. 조씨는 "아내에게 알려질까봐 신분을 속였다"고 진술했다. "일본에 가기 위해 3000여만원의 경비를 마련하려고 했다"는 것이 조씨가 밝힌 범행 동기다.

조씨에게 '대도'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80년대 초. 부유층을 상대로 수천만원대의 물방울다이아몬드 등 고가품을 훔친 사실이 알려지면서 당시 군부정권의 부정부패에 염증을 느꼈던 일부 국민은 그를 '의적'으로 부르기도 했다.

82년 경찰에 검거될 때까지 수개월 동안 수사망을 피해다녔으며, 83년에는 재판을 받다 달아났다가 6일 만에 경찰이 쏜 총에 맞고 붙잡혔다. 재판 과정에서는 "다른 절도범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판.검사집은 들어갔다가도 그냥 나왔으며, 흉기를 쓰지 않고, 훔친 돈의 30~40%를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쓴다"는 절도 철학을 공개해 화제가 됐다.

징역 15년(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98년 청송교도소에서 출소한 그는 기독교에 귀의해 새 인생을 사는 듯했다. 99년 23살 연하의 아내를 만나 아들(6)을 낳았고, 사설 경비업체 자문위원으로 취직해 '도둑잡는 도둑 출신'이 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조씨는 2000년 11월 선교활동을 위해 일본에 갔다가 도쿄 주택가에서 손목시계 등을 훔치다 경찰에 붙잡혔다.

조씨는 당시 일본 경찰에게 흉기를 휘두르고 저항하다 총에 맞아 부상했다. 징역 3년6월 형을 선고받고 일본에서 복역한 조씨는 지난해 3월 비밀리에 한국에 들어온 뒤 선교 및 봉사활동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전국을 무대로 수십여 건의 절도 행각을 벌여온 것으로 경찰은 파악하고 있다.

조씨는 지난 20일 오후 9시10분쯤에도 서울 마포구 서교동 권모(53)씨의 집에 몰래 들어가 거실에서 마주친 가정부에게 칼을 들이대며 "금고 비밀번호를 대라"고 위협하다 도주하기도 했다. 조씨는 또 다단계 회사에서 일하기도 했고 기계수입상인 친구를 거들며 한 달에 100만원 정도를 용돈 명목으로 받은 적도 있다고 경찰은 밝혔다.

경찰은 이날 조씨에 대해 특수절도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한편 조씨는 2000년 본적지를 서울에서 독도로 옮긴 것으로 밝혀졌다.

박성우 기자 <blast@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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