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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半 타의半' 물러난 CEO…테헤란밸리 속속 再入城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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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半 타의半' 물러난 CEO…테헤란밸리 속속 再入城

벤처 열풍을 타고 테헤란밸리에 화려하게 입성했던 수많은 CEO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리를 내놓고 사라졌다. 하지만 그동안 배운 값진 경험으로 각자 새로운 변신을 모색하고 있다.

김영삼 아이러브스쿨 前사장

김영삼 아이러브스쿨 前사장

“제가 창업했다는 이유만으로 계속해서 이 회사를 이끈다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저 자신이나 회사를 위해 그릇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위의 많은 사례들을 보면 창업자의 무리한 욕심으로 회사가 발전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봐왔습니다. 저는 그런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다시금 학교로 돌아가 경영을 하면서 느꼈던 많은 부족한 점을 배우려 합니다.”
지난 3월 아이러브스쿨 사장직에서 물러나면서 밝혔던 김영삼 前 사장의 사임의 辯이다. 창업 당시 김 前사장은 카이스트 박사과정 중에 있었다. 조용히 공부나 하며 지내고 있을 줄 알았던 그가 다시 테헤란밸리로 돌아왔다. 사임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렇게 빠른 복귀는 의외다.

김 前사장은 4월 중순 테헤란밸리 한 귀퉁이에 사무실을 냈다. 회사 이름은 밸류랩.

한달만에 복귀한 김영삼 前사장

사장직에서 물러난 것으로 따지면 한 달 남짓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김 前사장은 “돈주고 얻은 사무실은 아니고 아는 사람이 남는 공간을 제공해준 정도”라며 “특별히 무슨 사업을 진행 중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아이템을 구상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 사무실에는 아이러브스쿨 창업 당시 함께 일했던 옛 동료 몇 명이 자리를 잡고 있다. 사무실은 있지만 특별한 업무가 없기 때문에 자유스럽다. 출퇴근 시간 같은 것도 물론 없다.

“각자 새로운 아이템을 연구하고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함께 토론하고 있다. 새로운 아이템이 구체화되면 하나씩 독립시켜 사업을 전개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 前사장은 여전히 아이러브스쿨의 지분 17%를 보유한 주요 주주다. 그리고 고문직도 맡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아이러브스쿨의 고문 자격으로 회사에 나가 업무를 본다. 하지만 의사결정에까지 관여하지는 않는다. 사업 방향에 대해 조언을 해주는 정도.

그밖에 일주일에 한 번 학교에 나가는 것도 그의 주요 일과 중 하나다. 박사과정도 새롭게 시작했다. 하지만 학위 자체에는 별 뜻이 없다고 말했다.

“박사학위를 받고 학교에 남아 계속 연구를 하거나 학생들을 가르칠 생각은 없다”며 “그런 의미에서는 더 이상 공부에 미련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김 前사장은 아이러브스쿨의 사장자리에서 물러난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아쉬움이 없다고 했다. 할 만큼 했고 또 지금은 다른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 때문이다.

또 아이러브스쿨의 미래에 대해서도 확신하고 있었다. 단순한 회원의 ‘수’ 때문이 아니라 ‘질’ 때문이다. 회원들의 출신학교별 데이터를 가진 사이트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2∼3년 정도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코스닥에 등록하는 것을 반대했던 것도 바로 그렇게 되면 빠른 시간에 수익을 올리도록 재촉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무실을 오픈하고 새로운 사업에 대해 철저히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마 준비 부족으로 고생했던 아이러브스쿨의 경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기본 인프라를 구축하기도 전에 사이트가 너무 커져버렸기 때문에 제대로 된 서비스를 할 수 없었다.

그는 돈도 조금 벌었다. 사장직을 물러나면서 마음 고생도 했다. 예상 외로 빨리 ‘이 바닥’으로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해 그는 “1년 반 남짓밖에 사회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은 해보고 싶은 일이 많고 나이도 어리기 때문에 쉴 때도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동창생 찾기라는 대유행을 일으킨 주인공이지만 정작 지금 계획하고 있는 사업은 그런 성격과는 좀 거리가 멀다. 시류에 타지 않고 1∼2백년 지속될 수 있는 그런 회사를 만들고 싶은 것이 재기를 노리는 김 前사장의 꿈이다.

박태웅, 안철수연구소 자회사 대표로

박태웅 인티즌 前사장

인티즌 공동대표에서 물러났던 박태웅 前사장은 현재 ‘자무스’라는 보안관련 벤처기업의 CEO를 맡고 있다. 자무스는 최근 안철수연구소의 투자로 설립된 자회사다.

인티즌 대표에서 물러난 것이 지난 해 7월. 그해 10월 안철수연구소의 자문위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박사장이 이곳에 오기까지는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안철수 사장의 배려가 작용했다. 박사장은 “여러 제의가 있었지만 안철수 박사 때문에 이곳에 오게 됐다”며 “컨설팅 관련업무로 일을 다시 시작했다”고 말했다.

보안시장 전반에 걸쳐 서베이를 하고, 리포트를 작성했다. 자신이 작성한 리포트를 토대로 전자서명 분야의 응용 솔루션 업체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박사장은 “전자 서명은 오프라인으로 따지면 ‘인감’ 같은 것”이라며 “아직까지 응용 솔루션이 거의 없는 초기단계지만 시장 전망이 무척 밝다”고 전망했다.

아직까지 제품 개발이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다. 현재 80% 정도 개발이 이루어진 상태. 7월 정도면 제품을 선보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박사장으로서는 생소한 분야의 일을 하게 된 셈이다. 그 자신도 “지금까지 해온 일이 인터넷 서비스 분야였기 때문에 보안 솔루션이라는 분야가 낯설고 조금은 생소하다”며 “힘들지만 이 분야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도움이 많이 되고 재미도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마음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어 좋다”고 덧붙였다.

인티즌에 관련된 질문에 대해서 박사장은 말을 아꼈다. 이미 지난 일이고 거기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

달라진 경영 스타일에 대해 박사장은 “사람에 대한 판단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능력보다 인간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게 됐다는 것이다. 물론 예전에도 인간성을 무시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 강도가 훨씬 커진 것이다. 직원을 채용할 때도 첫째가 ‘인간성’이고 능력은 그 다음이라고 했다. 새롭게 인력을 보충하면서 능력이 탁월하지만 팀워크를 해칠 것 같은 사람들을 몇몇 그냥 돌려보냈다고 덧붙였다.

박사장은 현재 자무스 일 이외에 일주일에 한 번 아침 라디오 방송에 고정으로 출연하고 있으며 방송국 전문 해설위원으로도 위촉을 받아 가끔씩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 주요 경제현안에 대한 해설을 하기도 한다.

제품 개발이 완전히 마무리되면 본격적으로 영업과 마케팅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를 대비해 서서히 사람들도 만나고 활동폭도 넓히고 있는 중이다. ‘인터넷 서비스’에서 ‘보안 솔루션’으로 말을 갈아탄 박 사장의 변신. 그 성공 여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원내에서 다시 재야로, 디지털랭크 곽동수 前사장

곽동수 디지털랭크 前사장

삼성, LG 등 11개 대기업의 공동출자로 출범한 디지털랭크의 곽동수 前사장. 사장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그만둘 때까지 그만큼 많은 화제를 뿌렸던 사람도 드물다. 우선 벤처 CEO로서는 다소 특이한 그의 경력이 화제거리가 되곤 했다.

곽 前사장은 국내 최초로 ‘테크니컬 라이터’라는 장르를 만들어내며 컴퓨터 관련 글을 써온 프리랜서이자, 베스트 셀러 작가, 방송인이다. 또 국내에서 처음으로 소호라는 타이틀을 건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디지털랭크 사장 자리에 올랐을 때 사람들은 ‘재야인사의 원내 진출’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지금은 ‘원내에서 다시 재야’로 돌아간 셈이다.

그가 대표직을 맡고 사무실을 얻은 것이 지난 해 5월, 사이트를 오픈하고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 7월, 중도하차한 것이 9월이다.

곽 前사장은 짧은 기간에 중도하차하게 된 이유에 대한 질문에 “2개월이란 시간이 무슨 실수나 잘못을 할 만한 시간이라도 되느냐”는 대답으로 당시의 불편했던 심기를 털어놓았다. 하지만 곧 “아마 벤처업계에서 최단명 CEO가 아니겠느냐”고 웃으며 “마무리를 잘했고 오해도 풀었기 때문에 아쉬움은 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자유스러운 경영 스타일에 대한 이해 부족, 그리고 11개사의 공동출자라는 복잡한 주주 구성으로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못했던 점도 한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 예전처럼 ‘프리랜서’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 있다. 그가 요즘 하고 있는 일은 크게 3가지이다. 첫째는 한국사이버대학의 겸임교수로 온라인 강좌를 하고 있는 것. 인터넷 활용 분야에 대해 그는 온라인으로 7백50여명의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다. 교수 직책을 맡고 있기 때문에 강좌 이외에 학사관리까지 책임져야 해서 업무량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그는 온라인 강좌가 “마치 심야시간대의 라디오나 TV방송 진행하는 것 같아서 무척 재미있다”고 말했다.

그의 강의를 듣는 제자들은 국내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걸쳐있다.

둘째는 케이블 TV 진행자로서의 활동이다. e채널이라는 케이블TV에서 하루에 30분씩 ‘유틸리티’에 대한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다음으로 산업인력관리공단에서 ‘국가공인자격증’ 제정과 관련된 업무에 관여하고 있다.

또 개인 홈페이지로는 유래 없이 국제 도메인 분쟁에까지 휘말렸던 그의 개인 홈페이지 사빈넷(www.savin.net)도 업데이트 작업을 하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신문과 잡지에 써왔던 그의 컬럼과 컴퓨터나 인터넷 관련 내용, 좋아하는 영화 등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너무 짧은 경영 일선의 경험에 대한 아쉬움이 없느냐는 질문에 “디지털 랭크 사장을 맡은 직후부터 그만두고 나서까지 수많은 제의를 받았다”면서 하지만 지금까지는 모두 거절한 상태라고 말했다.

“실수를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는 게 문제”라며 다소 신중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당분간은 지금 하고 있는 사이버대학과 방송 일에 전념하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영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조건이 맞고 관심사가 맞으면 다시 한 번 참여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는 것이다.

요즘 그의 주요 관심사는 PDA와 인터넷 방송이다. PDA에 관련된 책을 써보고 싶어서 준비를 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정말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정보통신과 문화를 관련시킨 연구소에서 연구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경영일선에 복귀하는 그의 모습을 당장 볼 수는 없겠지만 언제 또다시 신선한 바람을 몰고 테헤란밸리에 등장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투자회사 설립한 오혁 전 대표

오혁 前옥션 사장

옥션의 공동대표였던 오혁 前사장도 짧은 휴식을 마치고 곧 테헤란밸리로 복귀했다. 투자회사인 ‘브리앙그룹’을 직접 창업한 것. 이 회사는 투자지주회사 성격으로 ‘브리앙파이브’와 ‘브리앙상사’를 자회사로 거느리고 있다.

브리앙 상사는 디스플레이 소자를 생산하는 ‘브리앙 NDM’과 분말야금 미세소자를 생산하는 ‘가야 AMA’, B2B 솔루션 개발업체인 ‘e타이드’로 구성되어 있다.

온라인 기업을 운영해왔던 경력과는 달리 오프라인에서 기술을 가진 기업들을 집중적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옥션 지분도 매각했다.

골드뱅크의 김진호 사장은 이런 부류의 변신을 시도한 CEO의 원조격에 해당한다.

골드뱅크를 물러나면서 ‘벤처기업의 개척자’ ‘사기꾼’이라는 극단적인 평가 속에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던 그 역시 지금 ‘화려한 변신’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다.

김진호 사장은 이미 알려진 대로 일본에서 엠스타라는 커뮤니티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일본 관련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말을 빌면 “이미 일본 내에서 이 분야에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는 평가다. 벤처 열풍을 타고 테헤란밸리에 화려하게 입성했던 수많은 CEO들. 이들 중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독보적인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CEO들이 있는가 하면 ‘자의반 타의반’ 떠밀려 불명예스럽게 물러난 경우도 있다.

한 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어느 새 소리도 없이 자리에서 물러난 CEO들도 있다.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마음 고생은 했지만 정말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너무나 값진 경험을 했다 것. 그리고 그 경험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변신에 관심을 갖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스스로 CEO 자리 내놓고 일선으로

최근에는 창업자인 대표가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업계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들은 CEO 자리를 박차고 영업담당자로 직접 필드에 나가거나 연구개발을 위해 연구실로 돌아가는 사람들이다. eCRM 전문업체인 이씨마이너의 김광용 사장은 지난 5월 7일부로 CEO 자리에서 물러났다.

현직 숭실대 교수이기도 한 김 前사장은 “설립 초기부터 꿈꿔왔던 세계 수준의 eCRM 솔루션을 만들기 위해 과감하게 CEO 자리에서 물러난다”며 “연구소장으로서 연구개발에 전념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밖에 나모인터랙티브의 박흥호 사장도 최준수 부사장에게 대표자리를 넘기고 개발에 전념하기로 했으며 앳폰텔레콤의 전국제 사장도 국내 영업 및 사업기획 부문 총괄 부사장을 맡으며 한재민 신임사장에게 대표 자리를 내놓았다.

홍익인터넷 노상범 前사장도 지난 2월 전문경영인 권오형 사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고 자신은 신규사업 개발부문 이사로 내려앉았다.

업계의 전문가들은 “벤처기업이 자리를 잡아가며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며 “투명한 경영을 위해 바람직한 현상이며 앞으로 이런 추세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떠나는 CEO, 돌아오는 CEO로 테헤란로는 어느 때보다 분주하다.

정재학 > 기자(zeff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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