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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의 '추사와 그 학파전'

중앙일보

입력

서울 성북동의 간송미술관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ㆍ1786-1856)의 서화가 남긴 발자취를 그 동지와 제자들의 작품으로 살펴보는 전시회를 마련한다.

간송미술관은 13일부터 27일까지 계속되는 '추사와 그 학파전'에 모두 120점의작품을 내걸어 추사 예술이 후대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다. 이번 전시는 추사의 작품을 기준으로 한 가운데 신위(申緯)ㆍ권돈인(權敦仁)ㆍ이조묵(李祖默)ㆍ조희룡(趙熙龍)ㆍ김수철(金秀哲)ㆍ이한철(李漢喆)ㆍ허유(許維)ㆍ이하응(李昰應)ㆍ김석준(金奭準)등 그와 더불어 한 시대양식을 일궈낸 인물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특히 간송미술관이 설립자인 간송 전형필의 수장품을 정리 연구해 이를 전시하기 시작한 지 30년만에 열린다는 점이 의미를 더한다. 간송미술관은 1971년 겸재 정선을 시발로 매년 봄과 가을에 한 차례씩 정기전을 열어 이번까지 모두 60회의 작품전을 개최하고 있다.

추사 관련전의 경우 1972년의 제2회와 3회 정기전에 이어 이번이 세번째라고 할수 있다. 추사 작품만으로 전시장을 채울 수 있는 곳은 현재로서는 간송미술관이 유일하다. 최완수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은 1972년 전시회 당시 '김 추사의 금석학'이라는 논문을 써 학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 연구소는 간송미술관이 설립해 운영중이다.

이번 전시는 대예술가이자 대학자였던 추사가 조선후기 사회에 던졌던 화두를되짚게 하는 계기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추사는 조선성리학을 이념기반으로 꽃을피웠던 진경문화가 노쇠하자 그 대체이념으로 청조고증학에 주목했던 인물로, 이를바탕으로 추사체라는 독특한 서화형식을 창안했다.

그가 청조고증학의 문호를 연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면 정조 이후 불어닥친 북학운동이 있다. 사회개혁을 꿈꾸던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해 중인계급이 그 주체세력으로 나설 수 있는 길을 텄다. 홍대용, 박지원같은 선각자들이 청나라에서 북학 이념을 배워 온 것도 그런 분위기와 직접 관련이 있다.

박제가로부터 북학 교육을 받은 추사는 24세 되던 해에 동지부사로 청나라 연경(燕京)을 다녀온 뒤 학예(學藝)일치를 주장하며 후일의 혁신계열에 큰 영향을 주었다. 강화도조약의 주역인 신헌, 유대치, 오경석은 물론 서원철폐 등으로 기존 성리학에 반기를 들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그 제자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술에 국한할 때 추사는 서화불분론(書畵不分論)을 내세우며 극단적 감필(減筆)로 대상의 본질을 압축표현하는 이른바 일격화풍(逸格畵風)을 구현했다. 그는 '한자는 상형문자에서 나왔고 상형문자는 곧 그림이며, 따라서 한자는 극도의 추상화'라는 인식 아래 문자의 회화성에 큰 관심을 보였다. '글씨는 그림처럼 쓰고 그림은 글씨처럼 그리라'고 설파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번 전시회에 작품이 나오는 그의 동료와 제자들은 추사의 이같은 예술관에 입각해 그림을 그리고 붓을 휘둘렀다. 초상화의 대가였던 이한철은 <이하응 초상>과 <묘길상> 등의 담채화를 통해 스승의 뜻을 관철했고, 김수철 역시 <설중한매(雪中寒梅)><무릉춘색(武陵春色)> 등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추사의 예서와 이하응의 행서, 추사와 권돈인의 서예 등을 나란히 전시함으로써 그 영향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것도 재미있는 착상이다.

최완수 실장은 "추사는 글씨가 단순한 기호에 그치는 게 아니라 회화로서의 공간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위인으로 한자문화권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체인추사체를 창안하는 데 성공했다"면서 그림을 별로 그리지 않은 추사였지만 제자중에화가가 많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치세능력을 잃은 성리학을 대체할 사상으로 청조고증학을 염두에 두고이를 새로운 사회이념으로 등장시키려 했던 것은 그가 단순한 예술가에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고 설명한 뒤 "서세동점(西勢東占)이 없었더라면 중인계급 중심의 북학파 계열이 역사의 주체세력으로 등장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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