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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스타열전 (60) - 크레익 비지오

중앙일보

입력

새천년의 시작으로 온세상이 들떠 있던 2000년,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주전 2루수도 이 흥분에서 결코 예외일 수 없었다. 하지만 시즌 초의 흥분은 종반이 되면서 절망감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는 8월1일 이후 경기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고 그저 팀의 몰락을 지켜보는 것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1965년 뉴욕에서 태어난 크레익 비지오는 1987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22번째로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지명을 받으며 텍사스에서의 인연을 시작했다.

고교시절 종종 유격수로 나서기도 한 그였지만 뉴욕에 위치한 시튼홀대학으로 진학해서는 4년동안 줄곧 포수로서 뛰었다. 또한 대학 3학년때는 .407의 뛰어난 타율로 범상치 않은 타격 재질을 과시하며 올아메리카 퍼스트팀에 선정되기도 했었다.

비지오가 빅리그를 노크하기에 걸린 시간은 1년 남짓이었다. 행운도 따랐다. 부상을 당한 주전포수 앨런 애시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비지오는 88년 6월26일 빅리그에 올려졌다. 첫해 50경기에 출전하는데 그친 비지오는 2할1푼대의 저조한 타율을 기록했지만 포수라고 믿겨지지 않는 빠른 스피드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89년은 의미가 많았던 한 해였다. 포수 1번타자라는 좀처럼 보기드문 모습을 연출한 것도 그 때였지만 그보다도 주전의 자리가 그에게 돌아간 것이 잊지 못할 사건이었다. 5월 중순 팀은 애시비를 웨이버로 공시했고 애스트로스의 홈플레이트는 비지오의 차지가 되었다. 주전을 보장받자 비지오는 그동안 숨겨졌던 타격 재능과 빠른 발을 마음껏 발휘했다. 사실상의 빅리그 첫해였던 그 해 비지오는 포수부문 실버슬러거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공격에서의 성공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포수로서의 수비력은 고개를 가로젓게 만들었다. 2루송구 능력과 포구에서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다.

90년 비지오는 간간이 중견수로 나서며 변화를 꽤했지만 이 시도는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타격만큼은 지속적인 상승세를 그리고 있었고 팀 역사상 처음으로 포수 수위타자라는 새로운 기록을 만들어냈다. 특히 26개의 내야안타와 2년연속 달성한 20도루는 포수라는 사실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였다.

91년 스프링캠프에서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와의 만남은 그의 타격을 한단계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키는 초석이 됐다. 그해 비지오는 3할에 가까운 타율로 다시 팀내 리딩히터자리에 올랐고 149경기에서 병살타는 단 두번밖에 기록하지 않으며 메이저리그에서 병살타를 유도하기 가장 힘든 선수로 인정받았다. 애스트로스 포수로서 첫번째 올스타 출전이라는 영광을 안은 것도 이 때였다.

92시즌 그는 마침내 2루수로 변신했다. 스프링캠프에서의 수많은 땀방울은 161경기에 출전 12개의 실책만을 범한 안정감있는 내야수로 그를 변모시켜 놓았다. 또다시 올스타 경기에도 나서 메이저리그 역사상 한 선수가 포수와 2루수로서로 올스타 경기 출전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도 했다.

92년과 93년, 비지오의 타율은 하향세였지만 출루율과 장타율은 오히려 상승세에 있었고 이는 94년의 3할타자로 나타났다. 39개의 도루와 44개의 2루타는 리그 1위였고 처음으로 삼진보다 많은 볼넷수를 기록했다. .411의 출루율과 병살타를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 그의 타격은 폭발적인 팀공격력의 키워드였다. 수비에서도 그는 2루수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으며 4년 연속 황금장갑의 첫번째 수상을 했다.

94년 투타에서의 맹활약은 95년 그를 처음으로 팬선정 올스타에 뽑히도록 했다. 연말 그는 다시 2루수부문 실버슬러거에 뽑혔고 골드글러브도 그의 차지였다.

또한 비지오는 리그 1위(22개)의 몸에 맞는 공으로 그가 절대 몸을 사리는 스타플레이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리고 2년연속 3할 이상의 타율, 리그 1위인 123득점, 4할이 넘는 장타율과 출루율은 그를 처음으로 MVP후보에 올려 놓기도 했다.

시즌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은 비지오의 행보를 주시했다. 프리에이전트의 자격이 주어진 그 해 겨울 팀의 2천만달러 제의를 거절할 때만 해도 그의 이적은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제프 베그웰이 팀과의 재계약을 맺자 주저없이 4년간 2천2백만달러의 계약에 합의했다.

96년에도 그는 여전히 뛰어난 공격력을 과시하고 있었고 공수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모습은 여전했다. 타석에서는 왠만해서는 삼진을 당하지 않았고 92년에 이어 전경기 출전을 기록하기도 했다.

97년 그의 나이는 31살의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야구선수로서의 그는 더욱더 원숙미를 더하고 있었다. 타율은 여전히 3할을 상회하고 있었고 146득점은 1932년 필라델피아의 척 클라인 이후 내셔널리그 한 시즌 최다득점 기록이었다. 홈런은 95년에 이어 팀역사상 내야수 한시즌 최다기록인 22개였고 장타율은 처음으로 5할대에 진입했다.

그러나 가장 돋보이는 기록은 162경기 전경기에서 단 한번의 병살타도 기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162경기로 한 시즌이 시작된 후 이 기록을 작성한 첫번째 선수가 됐다.

98년 그의 모든 공격수치는 몇 년간 그래왔듯이 그를 리그 최고의 선수라 칭하는데 전혀 손색이 없었다. 최다안타 2위(210개), 도루 2위(50개), 득점 4위(123점), 타율 6위(.325), 출루율 10위(.403)가 그가 98년에 거둔 주요성적표였다. 그리고, 그해 그는 2루타 53개와 50도루로 트리스 스피커 이후 한시즌 50개의 2루타와 50개의 도루를 동시에 수행한 첫번째 선수로 기록되었다.

99년 56개의 2루타를 기록하며 2년연속 50개이상을 기록한 메이저리그 6번째 선수가 된 그는 3할에 근접한 타율과 4할이 넘는 출루율로 팀의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3년우승의 밑거름이 되었다. 12년 변함없는 활약을 펼친 그에게 팀은 99년 겨울 3년간 2천8백만달러라는 구단 역사상 최고 금액의 연장 계약을 맺으며 프랜차이즈 플레이어에 대한 보답을 해주었다.

그런 그에게 2000년은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희망가득한 한해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즌초반 그는 타격부진에 시달려야 했고 8월 1일 플로리다 마린스와의 원정경기에서 7회 수비중 병살을 막기 위해 달려들던 1루주자 프레스토 윌슨과 충돌하며 경기장에 쓰러지고 말았다. 당시만 해도 그의 부상정도는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잠시동안 쓰러져 있기는 했지만 얼마후 그는 자기 스스로 걸어서 클럽하우스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왼쪽 무릎은 수술을 요할만큼 상당한 정도의 부상으로 판명이 났고 그는 그날 이후 플레이어로서의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며 시즌을 마감해야만 했다. 메이저리그 데뷰후 처음으로 부상자 명단에 오른 그의 부상이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시즌초반의 부진을 딛고 타격이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을 때 불운이 닥쳤다는 사실이었다.

8월10일 수술대에 오른 그는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지만 2001시즌을 기약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그의 모습을 다음시즌 종반에 가서야 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지오는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을 거부하고 올시즌 스프링캠프에서 다시 모습을 나타내며 재기를 선언했다. 혹 섣부른 복귀가 부상 재발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가 올시즌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그런 생각들이 기우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5월5일(한국시간)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몬트리올과의 경기에서 그는 팀 역사상 최초로 2천안타를 기록한 선수가 되며 팀역사에 또 한번 자신의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크레익 앨런 비지오 (Craig Alan Biggio)

- 1965년 12월 14일 생
- 180cm, 81kg
- 우투우타
- 연봉 : 775만달러(2001시즌)
- 소속팀 : 휴스턴 애스트로스(1988~ )
- 통산성적 : 1,830경기, 타율 .291, 출루율.381, 163홈런, 750타점, 1,208득점 2,002안타 863볼넷 359도루
- 주요 경력 1988년 6월26일 메이저리그 데뷔
- 올스타 7회: 1991 ? 92, 94 - 98
- 실버슬러거 5회: 1989, 1994 - 95 , 97 - 98
- 골드글러브 4회: 1994 -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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