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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 전 묻힌 유골 파보니 두개골이…경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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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고(故) 장준하(1918~75) 선생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 독재에 맞섰던 재야 정치인이다. 월간 ‘사상계’를 창간해 민주화 운동을 이끈 공로로 62년 한국 최초로 막사이사이상 언론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재야의 핵심 인물이었던 그는 75년 8월 경기도 포천 약사봉을 등산했다 내려오면서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목격자 김용환씨는 “하산길에 실족사했다”고 했다. 사건을 조사한 검찰도 사망 원인을 ‘등산 중 실족에 의한 추락사’로 발표했다.

 일부 언론에서 “하산하려면 경사 75도, 높이 12m의 절벽을 타야 했다” “추락사인데 두개골과 골반 외에는 골절이 없다”며 의혹을 제기했지만 묻혀버렸다.

 장준하 선생의 사망 원인을 둘러싼 논란이 사후 37년 만에 다시 제기되고 있다. 그의 묘를 이장하면서 유골에 대한 검시가 다시 이뤄지면서다.

 지난 1일 나사렛천주교 공원묘지의 장 선생 묘역에서 서울대 법의학연구소 이윤성 교수에 의해 검시가 진행했다. 검시는 눈으로 관찰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장 선생의 두개골에는 외부 충격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원형의 함몰 흔적이 발견됐다. 두개골 오른쪽 뒷부분은 지름 6㎝ 크기로 움푹 들어가 있었다. 이 부분은 여러 조각으로 쪼개져 안쪽으로 함몰돼 있었다.

 이 교수는 소견서에 “사망 원인은 머리뼈 골절과 이에 따른 두개내출혈·뇌 손상으로 본다. 머리뼈와 골반 외에는 손상이 없었다”고 썼다. 하지만 이 교수도 “이 손상이 뭔가에 맞아 생긴 것인지 또는 넘어지거나 추락하면서 부딪쳐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다”며 추락사인지, 타살인지에 대한 판단은 보류했다.

 이 소견은 장 선생 사망 당시 시신을 검안했던 조철구 박사의 견해와 대부분 일치한다. 조 박사는 당시 타살이라 단정 짓지는 않으면서도 단순 추락사가 아닐 가능성을 소견서에 썼다. 당시 소견서는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두개골 함몰골절상이지만 외상을 입기 쉬운 견갑부·주관절부·팔다리관절부의 손상이 전혀 없고 넘어지거나 구른 흔적이 없다. 뒤통수의 골절 부위가 추락으로 인해 손상되기 어려운 부위라고 지적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사실 장 선생의 사인을 밝히려는 노력은 과거에도 있었다. 94년 민주당이 진상조사위원회를 설치하며 사망원인 규명에 나섰다. 2002년과 2004년 대통령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장 선생의 사망 원인을 파헤쳤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 증거부족으로 인한 ‘진상 규명 불능’이었다.

 이번엔 처음으로 유골 사진이 공개되면서 다시 주목을 끌고 있다.

 전문가들은 유골을 육안으로 검시한 것만으로 타살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고려대 황적준 법의학연구소장은 “당시 부검에 의한 사진 기록이 없어 외부의 힘이 정확히 어떤 방향으로 들어왔는지 알 수 없다”며 “절벽에서 떨어진 상황이라면 나뭇가지에 의해서도 두개골 손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경찰청 김원배 범죄수사연구원은 “추락사에서 흔히 보이는 목뼈·허리뼈 골절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타살이라 단정하기에는 유골 검시만으로 부족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37년 전에 벌어진 이 사건이 대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겨냥한 정치 쟁점으로 비화되고 있다.

 17일 경기도 파주 성동리 장준하공원에서 장 선생의 37기 추도식이 열렸다. 민주통합당은 이날 자체적으로 ‘고 장준하 선생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이부영 상임고문을 위원장에 임명하고 진상 규명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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