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왜 부인 이름으로 후원금 내야 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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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선관위가 최근 공개한 정치후원금 내역을 보면 정치자금 투명화의 제도적 보강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물론 지난해 개정된 정치자금법은 정치자금을 투명화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중에서도 선관위가 120만원 이상 고액 기부자의 명단을 공개키로 한 것은 은밀하게 이뤄지던 과거의 정치자금 관행으로 비춰볼 때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여전히 편법과 불법 후원이 이뤄지고 있음이 이번 선관위의 명단 공개를 통해 드러났다.

보도에 따르면 주부의 이름으로 기부했지만 정작 돈을 냈다는 주부 본인은 기부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있었고, 돈을 받은 의원이 돈을 낸 주부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답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 기업 간부들이 회사와 본인의 이름을 숨기기 위해 부인의 이름을 빌렸기 때문이다. 부부라는 특수관계가 인정될지 몰라도 현행법상으로는 차명 또는 가명으로 기부할 경우 2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돼 있다.

그런가 하면 특정 대기업 임원 11명은 관련 국회 상임위원 12명을 포함해 의원 35명에게 1000만원씩 골고루 기부한 경우도 있었다. 본인들은 자신의 돈으로 후원금을 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솔직히 믿기지 않는다. 만약 회사 돈으로 정치자금을 냈다면 기업 단위의 기부를 전면 금지한 현행 정치자금법을 위반한 것이다. 선관위가 이 부분에 대한 정밀실사에 나서겠다고 하는 것도 본인 돈이 아니라 회사 돈일 개연성을 높게 보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자금의 한국적 풍토를 모르는 바 아니다. 여야 정치권의 눈치를 봐야 하는 기업의 입장으로선 손을 내미는데 안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름을 밝히기도 곤란하기 때문에 편법과 불법을 자행했을 것이다. 현실에 맞게 정치자금법을 고치자는 주장이 정치권과 재계 일각에서 나오는 것도 그런 사정을 감안해 달라는 것일 게다. 그러나 그래서는 정치개혁은 그만큼 더뎌질 수밖에 없다. 그런 굴레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정치자금의 투명화가 제도적으로 더욱 보강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