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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공사 20개월에 하려다 … ” 과욕이 빚은 경복궁 옆 참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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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3일 오전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신축공사장 화재 현장에서 미처 대피하지 못한 한 인부가 검은 연기에 휩싸인 채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변선구 기자]
13일 오전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신축공사장 화재 현장에서 구조대원들이 부상자를 구급차로 이송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하 서울관) 공사현장에서 발생한 화재사고는 인재(人災)일 가능성이 높다. 우선 공사를 너무 서둘러 진행한 정황이 있다. 부지 발굴이 완료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설계를 공모하고 당선작을 뽑았을 정도다.

 서울관 계획이 발표된 것은 2009년 1월 15일이다. 이날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 소격동 기무사 부지 강당에서 연 문화예술인 신년 인사회에서 “기무사 부지를 미술계의 오랜 숙원인 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조성하겠다”고 말했다. 같은 날 오후 유인촌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기자회견을 하고 “현재 부지에 있는 10개 건물을 헐지 않고 리모델링해 서울관을 2012년께 완공하겠다”고 밝혔다.

 이로부터 1년7개월도 안 된 2010년 8월 6일 서울관 설계 당선작이 발표됐다. 미술관 측은 “8개월의 기본설계와 실시설계를 거쳐 시공 20개월 일정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다만 문화재청이 벌여 온 부지 발굴 과정에서 다양한 변수가 발생할 가능성은 언제든 받아들일 것”이라고 밝혔다. 발굴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설계 공모 당선작이 발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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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구의 공공 프로젝트를 심의하는 도시공간예술위원회 위원장인 승효상 이로재 대표는 13일 “부지 발굴조사·지표조사는 그 땅에 뭔가 짓겠다는 생각을 할 때부터 착수해야 하는 것”이라면서 “설계 후 지표조사를 해서 뭐가 나오면 설계를 다 바꿔야 하니 공모 자체가 소용없는 것 아니냐. 시간을 줄이기 위해 무리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승 대표는 “서울시 건축심의위원회에 미술관 건립안이 올라왔을 때도 제동이 있었고, 최종 건축 허가 주체인 종로구청에 건립안이 올라왔을 때도 위원장인 내가 ‘공기에 무리가 있다’고 의견을 냈지만 소용없었다. 심지어 주 설계자(홍익대 민현준 건축과 교수)조차 ‘무리가 있으니 절차를 늦춰 달라’고 부탁했을 정도였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그 정도 규모와 정황(주변 문화재)이 있는 곳이면 4년은 잡아야 할 공사인데, 20개월 내 완공은 말이 안 된다”며 “건립을 발표한 이명박 대통령조차 본인은 착공식만 하겠다고 했는데도 아랫사람들이 무리했고, 누구도 거기 제동을 걸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서울관 권오기 건립팀장은 “지난해 7월 건물 철거가 끝나고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를 발주할 시점부터 내년 2월 공사 완료를 목표로 기간을 맞춰서 하는 거지 갑자기 공기를 맞춘다고 여러 작업을 하는 게 아니다”고 해명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13일 화재와 관련해 중앙사고수습지원본부를 설치한다고 밝혔다. 문화부 나종민 대변인은 공사 연기 가능성에 대해 “사고 수습이 끝나고 나서 정밀 안전진단을 통해 공사 연기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며 “육안으로 판단하기에는 공사에 큰 차질이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인 판단은 결과가 나와야 알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서울관 화재는 매번 반복되는 화재 참사의 공식을 따르고 있다. 유독가스를 내뿜는 우레탄 발포를 밀폐된 공간에서 했고 여기에 불똥이 튀면서 대형 화재로 번진 것이다. 40명의 목숨을 앗아간 2008년 1월 경기도 이천 냉동창고에서도 우레탄 가스가 가득 차 있는 밀폐 창고에서 용접작업을 하다 화재가 났다.

 현장의 안전불감증이 이번 참사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 전문가의 분석이다. 불붙기 쉬운 우레탄 발포작업은 극도의 주의를 요구하는데 이번 역시 안전관리를 소홀히 하다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이번 화재는 공사 단계라 내열재 등이 갖춰져 있지 않았고 스프링클러 등 소화장비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송대 안세진(소방방재학) 교수는 “이런 사고의 대부분은 용접 규칙을 안 지켰을 때 생긴다”며 “법이 문제가 아니라 의식이 문제인 것”이라고 말했다.

 안전공정관리지침상 우레탄 발포와 용접작업은 시간과 장소를 엄격히 분리해 진행해야 한다. 세명대 윤용균(소방방재학) 교수는 “우레탄 발포와 용접을 동시에 하는 건 기름통 안에서 담뱃불을 붙이는 것과 같은 일”이라며 “두 작업은 완전히 분리돼야 하는데 작업 공정을 서두르다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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