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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2012 사공의 눈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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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8일 부산시 거제동 부산지법 11계 경매법정에 16척의 선박이 새 주인을 찾아 매물로 나왔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끈 건 삼호해운 소속 탱커선(정유와 같은 액체화물운반선) 4척. 삼호해운은 지난해 1월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됐다가 풀려난 ‘아덴만의 영웅’ 석해균 선장이 소속됐던 곳이다. 해적 납치 사건의 후유증에 경기 불황까지 겹쳐 삼호해운은 지난달 파산했다. 4척 중 가장 규모가 큰 ‘삼호사파이어호’(8686t)는 2008년 12월 진수된 새 배다. 감정가는 283억원으로, 2204만원의 청구금액을 변제하기 위해 매물로 나왔다. 이날 경매에 참여한 이는 4명뿐이라 법정은 한산했다. 16척 중 삼호해운 소속 배 2척을 포함해 총 4척이 주인을 찾았다. 119t의 예인선은 감정가(4억800만원)의 22%인 8800만원에 낙찰돼 ‘눈물의 땡처리’ 수준이었다. 사파이어호는 유찰됐다.

새 주인을 기다리며 부산시 영도구 부산항에 정박 중인 탱커선 삼호사파이어(8686t)의 모습. 지난달 파산한 삼호해운 소속 배로 8일 첫 경매가 진행됐으나 응찰자가 없어 유찰됐다. [사진 지지옥션]

 전국 법원 경매시장에 빚잔치용 선박이 쏟아지고 있다. 현재 부산·인천·목포 등 각 지방법원에서 진행 중인 선박 경매 건수는 37건이다. 경기 불황으로 망하거나 자금난을 겪고 있는 해운사가 늘어나 재산 목록 1호인 선박이 경매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한국선주협회에 따르면 2008년 이후 폐업 등을 이유로 협회에서 탈퇴 처리된 회원사는 52곳이다. 한국선주협회 가입 조건은 배 한 척(1만t급)을 보유하고 있는 해외 운항 해운사(자산 규모 10억원 이상)로 현재 193개의 해운사가 소속돼 있다. 경매정보업체 지지옥션 하유정 연구원은 “세계 금융위기 이후 2009년 선박 경매 건수가 142건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가 다시 줄어들었는데 올해 다시 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경매 시장에 물건은 쏟아지고 있지만 낙찰률은 20~30% 선이다. 경기 불황으로 거액의 배를 선뜻 사려고 나서는 선주가 없어서다. 세광쉽핑의 5000t짜리 케미컬 운반선도 세 번 유찰 끝에 올 1월 감정가(53억원)의 절반 수준인 24억원에 낙찰됐다. 세광그룹의 세광쉽핑은 업계가 활황이던 2000년대 중반 사세 확장을 하다 조선경기가 나빠지면서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다.

 선박금융을 주로 하던 여신금융전문회사도 빚잔치용 선박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해운업이 활황이던 2000년대 중반 제2금융권에는 선박 리스·여신과 같은 선박금융 열풍이 불었다. 한 해운업계 관계자는 “자기자본 10여억원에 불과한 해운사에 캐피털사가 선박 하나만 믿고 140억원가량을 빌려주기도 했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믿었던 해운사들이 줄줄이 넘어가자 캐피털사들은 빌려준 돈 대신 선박을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선박리스 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던 신한캐피탈도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망한 해운사로부터 소유권을 이전받은 선박이 수십 척에 달했다. 빌려준 돈 대신 떠안은 선박 덕에 신한캐피탈은 졸지에 대형 선주사가 된 것이다. 신한캐피탈의 경우 2000년대 초반 2000억원 선이던 선박금융 운용자산 규모를 2008년 말 1조원으로 키웠다. 선박금융은 펄펄 나는 해운업과 함께 캐피탈사에 높은 수익을 안겨주며 효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경기가 나빠지자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됐다. 신한캐피털은 2009년 업계 최초로 이 배를 관리해 줄 해운사를 아예 설립했다. 신한캐피탈의 거래처인 국내 해운회사 몇 곳이 출자해 선박관리회사 ‘오에스쉬핑’을 설립했고, 신한캐피탈은 보유하고 있는 선박을 이 회사에 위탁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신한캐피탈이 배를 팔지 않고 해운회사를 차린 까닭도 불황 탓이다. 배를 해운회사에 팔 수도 없고, 그냥 바다에 세워둘 수도 없었다. 이용동 선박금융팀 부장은 “경기가 좋지 않아 구매자를 찾기도 힘들고, 값도 많이 떨어져 일단 배를 운용해 나가면서 팔 때를 기다리기 위해 낸 묘책”이라고 말했다. 신한캐피탈은 2010년 말 배와 회사를 모두 처분했다.

 예금보험공사도 최근 담보물로 인수한 배 7척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올 2월 파산선고를 받은 부산저축은행 소유의 선박이다. 부산저축은행의 파산재산관리를 맡은 예보는 이 배들의 처분을 놓고 해운업계에 조언을 구하고 나섰다. 배를 즉시 팔지, 좀 더 기다릴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다. 예보 관계자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해운업계 쇼크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곧 회복됐지만 지금은 선박 공급 과잉 문제가 장기화될 것으로 보여 매각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예보는 현재 배 7척의 공매를 진행하고 있다. 염정호 한국해운중개업협회장은 “요새 중고 배값은 활황기와 비교해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고 값이 싸다 보니 그리스·중국·노르웨이 같은 나라들이 정부에서 선박금융을 지원받아 우리 배를 사고 있다”고 말했다.

 아예 보유하고 있는 배를 폐기처분해 고철값을 받고 팔아버리는 해운사도 늘고 있다. STX팬오션은 지난해 10여 척의 노후 선박을 판 데 이어 올 상반기 5척의 벌크선을 2000만 달러(약 230억원)에 방글라데시·인도의 해체 조선소로 넘겼다. 고유가·경기침체로 운임이 뚝뚝 떨어져 노후 선박을 운영하느니 팔아서 고철 값이라도 건지는 것이 이익이라는 판단에서다. STX는 이런 노후 선박 처분으로 지난해 2분기 523억원의 영업이익을 달성하기도 했다. 한진해운·현대상선이 1000억원의 영업적자를 낸 것과 상반된 실적이다. 강대선 STX 상무는 “선박 공급 과잉 때 노후 선박은 운영하는 것보다 매각해 현금 유동성을 확보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영국의 조선·해운조사기관인 클락슨 리포트에 따르면 전 세계 선박 해체 물량은 2008년 950만t에서 지난해 2500만3000t으로 껑충 뛰었다. 올해엔 300만t을 돌파할 전망이다. 이처럼 고철 경쟁이 심해지니 해체 조선소에 내놓는 배 수명도 짧아지고 있는 추세다. 올 1월 일본 해운업체 MOL이 1995년 건조한 탱커 5척을 방글라데시 해체 조선소에 넘겼다. 해체 수명을 평균(25년)보다 8년 앞당긴 것이다. 양홍근 한국선주협회 상무는 “글로벌 해운 경기가 호황이던 2007년만 해도 건조된 지 30년이 넘는 노후 선박도 운항을 했는데, 요즘 점점 해체 수명이 앞당겨지고 있다”고 말했다.

선박금융 해운사가 발주한 선박을 담보로 받는 장기 융자와 여신금융전문회사가 선박을 사 해운사에 리스를 주고 리스료를 받는 선박리스 등을 포함한다. 조선사들이 자기자금만으로 배를 만드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빌리는 선박건조금융도 있다. 해운업계가 호황인 2000년대 중반 제2금융권에서 선박금융업에 대거 진출했다가 업황이 나빠지자 유동성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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