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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못찾은 내안의 햄릿

중앙일보

입력

어릴 때 공학도를 꿈꾸었던 내가 영문학으로 인생의 진로를 정한 것은 열아홉살 때였다.

1942년 태평양 전쟁이 터지고 진주만 공격이 있었던 바로 다음해 4월 나는 아직 '제국' 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던 도쿄(東京) 대 영문학과에 들어갔다. 영문학과로 가서는 드라마를 택했다. 드라마에 대한 관심은 그 전부터 시작됐다.

고교시절 도서관에서 모스크바 예술극장에 관한 영어책을 발견해 아주 흥미있게 읽은 적이 있었고, 심지어 그 일부를 일어로 번역해 교지에 실은 적도 있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니 네미로비치 단첸코니 하는 이름을 알고 있었고, 러시아혁명후 쟁쟁했던(스탈린 집권 전) 아방가르드 연극인들, 메이어홀드니 타이로프니 박탕고프니 하는 이름도 낯설지 않은 정도는 돼 있었다.

아무튼 이때부터 입센 이후의 근대연극에 대한 나의 관심과 열의는 내 마음의 공간 한 구석을 자리잡기 시작했고 그 지적.정서적 공간은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농밀함을 더해갔다.

시나 소설과 달리 현대 서구드라마는 입센.스트린드베리.체호프 등 근대극의 거장은 물론 20세기 유럽 각국의 대표적 극작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성립' 되기 힘들다. 이는 영문학의 테두리를 벗어나려는 나의 취향과 일치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내면의 공간은 거의 채워지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칠 일이 아니었다. 나에겐 더 큰 실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에 그것은 얼마간의 예감으로서, 아니면 약간의 호기심으로서 다가왔다.

대학 1학년 때 영문과 강의란 게 이렇다할 지적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가운데 오직 하나, 강단의 열기가 내 몸을 휩싸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강의가 있었다.

나카노(中野) 교수의 셰익스피어 강의였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시대를 이야기하고 극장 사정과 무대구조를 알려주면서 현대극과 다른 셰익스피어 연극의 특색을 강조하는 데만 한 학기를 보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셰익스피어가 무척 '재미있는' 극작가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대문호' '시성(詩聖) ' 등등의 신성 불가침한 대상으로서 첫 대면을 하지 않았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 점을 나는 이 교수에게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입문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의 텍스트를 '정독' 하는 일이었다. 새삼 들먹일 필요가 없이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이다.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먼 이국의 셰익스피어 학도라 할지라도 그의 극시(劇詩) 의 매력은 부인할 길이 없다.

언어를 매개로 해 펼쳐지는 상상력의 날개는 우리로 하여금 일상으로부터의 비상을 가능케 해주고, 그가 그려내 보이는 인물의 기라성 같은 군상을 보면 이 세상에 왜 상상적 문학이 필요한가를 직감할 수 있게 된다.

이 정신의 진수성찬을 누가 마다 하겠는가. 그것은 협소하나마 내 마음 속의 공간을 채워주는 더할 나위 없는 보물이었다. 그렇게 해서 어느 사이엔가 셰익스피어는 먼저 사귄 현대연극을 앞질러 내 마음 속의 번지수 앞자리에 매김을 하게 됐다.

1971년 나는 처음으로 영국 나들이에 나섰다. 셰익스피어를 만난지 거의 30년 만에 그의 고향, 그의 작품의 산실에 가게된 것이다.

영국 여행에서 나는 런던과 셰익스피어의 고향인 스트랫퍼드에서 상연되는 세 편의 감명 깊은 셰익스피어 작품을 보는 기회를 가졌다.

런던에서 본, 로렌스 올리비에가 샤일록 역을 맡은 '베니스의 상인' 은 공연도 공연이려니와 연극이 끝나고 나서 무대 뒤에 나타난 그의 맨 얼굴이 더욱 기억난다.

그는 그야말로 '타고난 배우' 로 여겨졌다. 피터 브룩이 연출한 '한 여름밤의 꿈' 은 마지막 회에 가까스로 볼 수 있었다.

이는 지금 생각해도 여간한 행운이 아니었다. 왜냐면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피터 브룩의 연출을 직접 볼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이다.

사실 문학작품으로 셰익스피어를 만났던 나는 셰익스피어극을 이렇게도 무대 위에 올릴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늘 머리로만 떠올렸던 셰익스피어의 고향 스트랫퍼드를 찾았다. 그가 태어난 집과 그의 외가.처가 등 그의 삶을 형성했던 장소들을 차례로 돌아본 뒤 찾은 곳은 당연히 셰익스피어 기념극장이었다. 당시 공연작품은 '십이야' 였다.

텍스트를 아무리 읽어도 감을 잡을 수 없는 셰익스피어극 특유의 그 낭만적 분위기며, 배우 하나하나의 표정과 대사가 뛰어난 장치의 도움을 얻어 뿜어내는 아름다움이란 좋은 공연이 아니고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아름다움을 나는 그 곳, 그 공연에서 느꼈다. 맨 처음 본 스트랫퍼의 분위기며 '십이야' , 이 모든 것은 지금껏 나를 사로잡은 심상(心象) 풍경으로서 남아 있다.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하나 해보자. 그 숱한 셰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서 당신은 어느 것을 제일 좋아 하느냐고. 쑥스럽지만 그의 원숙기 비극이라는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서 나는 '리어왕' 을 좋아한다. 무척 좋아한다. '맥베스' 도 놓치기 아깝다.

그러나 내 마음속 공간 1번지에는 '햄릿' 을 가져다 놓을 수밖에 없다. 내게 투영된 햄릿의 모습은 다양하다. 처음 나는 그를 삶의 우수에 찬 귀공자로 대했지만, 어느 사이엔가 둘도 없는 지성파로 변했다.

그것도 모자라 변덕 많은 익살꾼의 얼굴이 내다보이는가 하면, 서른도 되기 전에 인생을 달관한 철학자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는 그 변신의 요란함 또는 모호함에 매료된 것은 물론 아니다.

그 러나 유감인 것은 지금껏 내가 본 연극 '햄릿' 중에는 크게 감명을 준 게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데에는 세계 유수의 작품을 볼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국내 것은 물론이고 77년에 다시 찾은 런던에서 본 올드 빅 극장의 '햄릿' 도, 90년이던가 서울에 온 옛소련의 '햄릿' 도 그저 그랬다.

재미는 있었지만 로버트 윌슨의 1인극 '햄릿' 이나 지난해 서울에 온 리투아니아란 동유럽 조그만 나라의 '햄릿' 도 성에 차지 않았다.

오히려 감명이 컸다면 옛소련 시대의 코진체프가 감독한 영화 '햄릿' (64) 이 그 독특한 해석으로 해서, 최근 것으로는 네시간짜리 노커트의 케네스 브래너 연출의 영화 '햄릿' (96) 을 들고 싶다. 요즘 유행하는 얄팍한 셰익스피어 영화와는 사뭇 다르다.

이 주인공을 대할 때마다 나는 인생 운명 또는 '실존' 의 영원한 수수께끼라 해도 좋을 이런 작품을 왜 셰익스피어는 썼을까 생각해왔다.

팔순나이에 이른 지금 생각하면 아마 작가 자신도 속시원히 설명해주지 못할 것 같다. 그게 바로 삶(과 죽음) 의 깊디 깊은 참모습일 테니까. 그래도 내 마음속 공간의 첫 자리에는 여전히 셰익스피어와 '햄릿' 이 놓여 있다.

여석기 <학술원 회원.고려대 명예교수>

<약력>

▶1922년 경북 김천 출생

▶42년 일본 마쓰에(松江) 고 졸업

▶44년 도쿄(東京) 대 영문과 수료

▶46년 경성대(서울대 전신) 학사

▶53년~현재 고려대 교수.명예교수

▶77년~현재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87~89년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회장

▶88~91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

▶저서=『영문학사』『20세기 문학론』『동.서 연극의 비교 연구』『에세이 셰익스피어 명작선』『씨네마니아』『햄릿과의 여행 리어와의 만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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