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다 샤프 사장 “억장이 무너진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82호 07면

2일 도쿄 가전 매장에서 방문객이 샤프의 TV제품을 보고 있다. 샤프는 경영 악화로 내년까지 직원 5000명을 감축할 예정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생존, 그리고 자존심 회복. 일본의 글로벌 가전업체들이 지난 10년간 가슴 깊이 새기며 와신상담(臥薪嘗膽)한 구호다. 치열한 글로벌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고 전기·전자 기술 종주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의지다. 이들 가운데 ‘빅3’로 꼽히는 소니·파나소닉·샤프는 올 상반기에 일제히 최고경영자(CEO)를 교체하는 등 특단의 결전 자세로 임했다. 하지만 2일 나온 이들 업체의 경영 성적표는 이런 목표와 거리가 멀었다.

사면초가에 빠진 일본 전기전자산업

이 중에서도 올해 창사 100주년을 맞은 샤프가 가장 암담한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4~6월에 시장 전망치의 두 배인 1384억 엔(약 1조9950억원)의 순손실을 냈다.

매출은 4586억 엔(6조645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8% 줄었다. 연결재무제표기준으로 올해 2500억 엔(3조6000억원)의 적자가 예상된다. 연초 예상액 300억 엔의 8배 이상 규모다. 샤프는 지난해에도 사상 최대 규모의 적자(3761억 엔)를 냈다. 1951년 이후 62년 만에 처음으로 배당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이 같은 ‘어닝 쇼크’로 3일 도쿄 증시에서 샤프의 주가는 전날보다 28% 폭락해 1975년 이후 최저점을 기록했다.

현재 경영 상태로는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회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본 투자자들이 투매에 나선 것이다. 샤프의 이날 종가는 8개월 전인 지난해 12월 1일(779엔)의 4분의 1 수준이다.

샤프, 내년 3월까지 창사 첫 인력 감축
일본 전자제품의 상징이던 소니 역시 이날 주가가 8.2% 떨어졌다. 이 회사도 4~6월 TV와 PC 부문의 약세로 246억 엔의 적자를 냈다. 올해 전체로는 간신히 적자는 면하겠지만 흑자 규모가 200억 엔으로 당초 기대(300억 엔)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추산된다. 소니는 경영악화에 대응하기 위해 4월 1만 명 감원 계획을 밝혔다. 소니는 이런 식으로 지난 10년간 꾸준히 구조조정을 하면서 지금까지 수만 명을 감원했다.

샤프도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샤프를 살릴 새 책임자로 4월 내부 승진한 오쿠다 다카시(奥田隆司·59) 사장은 2일 실적발표 회견에서 “경영실적 악화에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다.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지만 인적 구조조정 없이는 회사 존립이 불가능하다”고 털어놨다. 최악의 상황에 몰린 회사 경영상태를 숨김없이 토로한 것이다. 그러면서 샤프 종업원의 9%인 5000명을 내년 3월까지 감축한다는 충격적인 계획을 공개했다. ‘일본 주식회사’의 자부심, 일류 대기업의 자랑거리였던 종신 고용 원칙을 포기한 것이다. 최대 500억 엔으로 추산되는 정리해고 비용이 올해 실적에 반영될 경우 연간 적자 폭은 2500억엔으로 불어날 전망이다.

사업 구조조정의 칼날은 샤프 최고의 자존심이자 핵심 부문을 건드리게 된다.

샤프는 액정TV를 만드는 도치기(栃木) 공장 규모를 축소하기로 했다. 오쿠다는 “엔고와 소비침체 때문에 국내 TV 생산의 채산이 맞지 않는다. 기존 형태의 TV 생산은 감축한다”고 밝혔다. 오쿠다는 “기대를 건 중국에서도 판매부진으로 재고가 쌓이고 있다”고 전했다. 태양전지 생산거점인 가쓰라기(葛城) 공장도 시설 감축에 들어간다. 주력 산업과 미래산업을 동시에 축소하는 것이다.

이렇게 몸부림치지만 경영환경을 둘러보면 탈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다. 사면초가(四面楚歌) 5중고(重苦)에 시달리고 있다. 디플레이션 엔고(高) 스피드가 떨어지는 고용구조 브랜드 경쟁력 저하기술 평준화 등 어느 것 하나 만만찮은 난제를 떠안고 있다.

브랜드 경쟁력을 보자. 샤프 등 일본 전기·전자 업계는 삼성전자·LG전자가 2000년대 초반 글로벌 강자로 떠오른 뒤 10년간 경쟁력 정비에 나섰으나 한국 업체의 벽을 넘지 못했다. 샤프의 주력 제품은 TV·액정디스플레이패널(LCD)·휴대전화로 이들 분야의 디자인과 제품력이 한국산에 밀린다. 특히 LCD 매출은 삼성ㆍLG에 밀려 3년째 하락세다. LCD 패널을 생산하는 샤프 사카이(堺) 공장 가동률은 4~6월 30%에 그쳤다. 이 부문에서 연1000억 엔의 적자가 발생할 것으로 추정됐다.

일본이 자랑하던 제품 경쟁력에 문제가 생긴 것은 기술에 대한 맹신 탓도 있다. 삼성·LG가 세계 트렌드를 좇아 제품을 개발할 때 일본 업체들은 고성능 제품 개발에 치중했다. 해외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독자 생태계에 안주하는 ‘갈라파고스 증후군’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최고 기술력의 자부심에 취해 바깥 세상의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샤프는 또한 의욕적으로 투자한 태양전지 사업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한국 업체들이 시장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해 스마트폰 개발에 집중하는 동안 샤프는 사업성이 검증되지도 않은 부문에 모험을 걸었다가 힘을 낭비했다.

기술 맹신과 내수 안주가 실패 요인
급변하는 세계시장에서 1970년대 고도성 장기의 기업 조직체계를 고수한 것도 문제였다. 오쿠다가 위기 타개책으로 인력 감축안을 들고나왔지만 더욱 과감한 인력구조조정 없이는 생존 발판을 만들기 힘들 것 같다. 샤프는 100년간 종신고용 체제를 유지해 왔다. 회사가 잘나갈 때는 순기능이 많았지만 어려움이 지속되는 시기엔 위기의식을 제대로 불어넣지 못했다. 오쿠다는 “매출이 급감하자 인건비 등 고정비 부담이 힘겨워졌다. 이제 모두 안고 갈 수 없게 됐다”고 털어놨다. 허리띠를 졸라맨다는 뜻으로 임원 급여부터 최대 50% 삭감하기로 했다.

오쿠다는 “구조조정으로 체질을 개선하면 상반기 바닥을 치고 하반기부터 실적 개선 조짐을 보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20년째 지속된 디플레이션(물가하락)과 엔고는 샤프의 경영 부진 탈출을 가로막고 있다. 일본 경제는 내수 비중이 80%에 달해 디플레이션은 기업 매출에 치명적이다. 내수 둔화와 기업 실적 악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기 때문이다. 극심한 엔고는 제조원가를 높이고 수출 단가에 압박을 줘 해외시장의 가격 경쟁력을 약화시킨다.

샤프의 자금 흐름도 심상치 않다. 내년 2000억 엔의 전환사채(CB) 상환을 앞두고 있는 데다 1조원에 달하는 대출금의 만기도 속속 돌아오고 있다. 일본신용등급연구소(JCR)는 샤프의 장기채권 등급을 A+에서 A-로 두 계단 강등했다. ‘수익 회복이 더디고 자기자본이 취약해지고 있다’ 는 이유다. 샤프의 자기자본비율은 3월 말 23.9%에서 6월 말 18.7%로 악화됐다. 이 때문에 샤프는 금융권에 협조융자 등 손을 내밀고 있다. ‘실탄’ 확보를 위해 액정패널을 만드는 사카이 공장의 지분 37.6%를 대만 합작사 훙하이(鴻海)정밀공업에 3월 매각했다. 샤프는 이달 중 출하를 시작하는 아이폰5용 패널에 기대를 걸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