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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런던] 지상 최대의 패션쇼 런던 올림픽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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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28일 오전 5시(현지시간 27일 밤 9시) 영국 런던.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큰 패션쇼’가 열렸다.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이다. TV 생중계로 현장을 지켜본 전 세계 시청자는 40억 명. 지상 최대의 패션쇼 ‘모델’로 나선 각국 선수들은 자국이 자랑하는 패션 브랜드의 옷을 입고 위풍당당 행진했다. 프랑스의 에르메스, 이탈리아의 조르조 아르마니, 프라다, 살바토레 페라가모, 미국의 랄프 로렌, 독일의 보그너…. 올림픽 기간 내내 시상대에서, 경기장에서 땀과 눈물로 얼룩진 감동의 순간을 빛내 줄 ‘문화 선수’들이다. 한국 선수단의 경우 단복은 빈폴, 운동복은 휠라를 입는다. 혼을 건 승부를 펼치며 한국 패션의 수준을 세계에 자랑한다. 런던 올림픽은 역대 어느 올림픽 때보다 참가국 간 패션 경쟁이 뜨겁다. ‘세기의 패션 올림픽’ ‘세계 명품 브랜드의 각축장’이란 얘기도 나온다. 런던 올림픽. 2012년 지구촌의 문화와 비즈니스, 선수들의 승부정신과 애국심이 경기장을 따라 꿈틀대는 소리 없는 전쟁터다.

개최국 영국, 2년 전부터 준비

2년 전인 2010년 7월 14일. 주최국 영국은 런던 올림픽에서 자국 대표팀을 ‘패셔니스타’로 만들기로 작정한 듯 선수단 운동복과 선수촌 일상복 등 패션을 총괄할 디자이너를 일찌감치 발표했다. 영국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39)였다. 가수 폴 매카트니의 딸이다. 독일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에서 ‘스텔라 매카트니 라인’을 만들어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영국의 대표 디자이너다. 고급 의상을 발표하는 파리 패션위크에선 자신의 이름으로 패션쇼도 열고 있다. 뒤질세라 패션대국 이탈리아가 합류했다. ‘이탈리아 패션의 제왕’으로 불리는 조르조 아르마니(77)를 내세웠다. 아르마니의 브랜드 ‘엠포리오 아르마니’의 스포츠의류 라인 ‘EA7’으로 이탈리아 선수들의 옷을 해 입힐 것이라고 했다. 이탈리아 반도 내륙의 작은 나라, 산마리노는 살바토레 페라가모에게 디자인을 의뢰했다. 독일은 보그너가 아디다스와 함께 디자인을 맡았다. 미국 국가 대표팀은 랄프 로렌이 의상 전체를 만들었다. 소위 ‘명품 브랜드’ 일색이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지금껏 볼 수 없었던 현상”이라며 “올림픽 역사상 첫 명품 패션의 각축장”이라고 평했다. 국가대표 선수단 의상뿐이 아니다. 프랑스 고가 브랜드 에르메스는 프랑스 승마 선수단에 별도 의상을 제공했다. 이탈리아 요트팀은 프라다에서 만든 경기복을 입는다.

  명품까진 아니어도 국가적 자존심을 바탕에 둔 브랜드 선택도 눈에 띈다. 우리나라 선수단의 공식 단복은 빈폴이, 운동복 등은 휠라가 맡았다. 빈폴은 제일모직 브랜드이고, 휠라는 본래 이탈리아 회사를 휠라코리아가 인수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스텔라 매카트니로 패션 경쟁에 불을 댕긴 영국은 개·폐막식엔 자국 대중 브랜드를 택했다. 올해 창립 30주년을 맞은 ‘넥스트’가 그 주인공이다.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 30여 개국에 진출해 있고 남성·여성복과 아동복, 홈인테리어 제품 등 라이프스타일 전 분야를 아우르는 회사다. 자메이카는 자국 출신 패션디자이너 세델라 말리를 참여시켰다. 유명 레게가수 밥 말리의 딸인 그는 스포츠 브랜드 푸마와 함께 대표팀 의상을 디자인했다.

올림픽, 패션 마케팅의 꽃으로

“이번 올림픽에서 더 많은 영국 디자이너가 단복·선수복 디자인에 참여해야 했다. 영국이 패션 디자인에서 가장 앞서 있는 나라란 걸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아쉽다.” 가디언의 일요판 ‘옵서버’는 1948년 4월 25일자 신문에 이렇게 보도했다. 당시 영국 대표팀 의상디자인에 내로라하는 패션디자이너가 거의 참여하지 않은 것을 두고서다. 영국 언론은 이때부터 올림픽이 자국 패션 홍보의 장이란 걸 깨달았지만 현대올림픽 역사에서 패션 자체가 큰 화제가 된 적은 거의 없었다. ‘운동복은 운동복일 뿐’이란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98년 일본 나가노에서 열린 제28회 겨울올림픽이 전환점이 됐다. 캐나다 대표팀은 자국 브랜드 ‘루츠(ROOTS)’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그려진 재킷을 입고 올림픽에 참가했다. 나가노 올림픽이 끝나자 루츠를 입은 유명인들의 모습이 각종 매체에 보도됐다. 영국의 찰스 왕세자,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 등도 루츠 옷을 입은 것이 목격됐다. 영화배우 로빈 윌리엄스는 아카데미 시상식에 이 브랜드 모자를 쓰고 레드카펫에 오르기도 했다. 올림픽을 통한 잦은 노출과 인지도 상승에 힘입어 캐나다 브랜드 루츠는 미국 국가대표팀 의상도 맡게 됐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겨울올림픽에서다.

스포츠산업 전문매체인 ‘스포츠비즈니스저널’은 당시 루츠가 “올림픽 경기에 노출돼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는 바람에 올림픽 기간 동안 2500만 달러라는 기록적인 매출을 올렸다”고 전했다. 최근 미국의 유력 일간지 보스턴글로브는 “랄프 로렌이 루츠의 성공에 자극받아 미국 올림픽 대표 선수단 유니폼 입찰에 뛰어들었다”고 분석했다. 랄프 로렌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시작으로 2010 밴쿠버 겨울, 2012 런던, 2014 소치 겨울, 2016 시카고, 2018 평창 겨울, 2020 올림픽까지 총 7회의 올림픽에 미국 대표팀 후원사로 계약을 맺고 있다.

생산지 논란에 짝퉁 구설수까지

명품 브랜드가 경쟁적으로 각국 대표팀 의상디자인에 참여한 올해 런던 올림픽은 그 어느 때보다 패션에 대한 관심이 높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국 주간지 타임은 각국 대표팀 단복·운동복에 대해 영화제 레드카펫처럼 ‘베스트 vs 워스트’ 패션을 꼽았다. ‘애국심’논쟁도 일었다. 미국 대표팀의 옷 디자인은 랄프 로렌이 했지만 생산은 중국에서 이뤄졌다.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 지난 11일 이 사실을 미국 ABC방송이 보도한 뒤 한바탕 난리가 났다. 미국 의류산업은 붕괴 직전이라 실직자도 많은데 어떻게 중국산 의류를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입히느냐는 비난이 일었다. 그렇지 않아도 중국의 부상에 예민해진 정치인들이 가세했다. 민주당 해리 리드 상원 원내대표, 공화당의 존 베이너 하원의장 등 여야가 한목소리로 미국 올림픽위원회(USOC)를 비난했다. 결국 USOC는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부터는 미국팀 유니폼을 미국 내에서 생산하기로 랄프 로렌과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타임은 “2008년 대표팀이 입은 랄프 로렌 의상도 중국산이었다”며 “언제부터 의원들이 미국 의류산업에 이다지도 관심이 많았는지 모르겠다”고 비아냥 섞인 논평을 내놓았다.

  주최국인 영국 대표팀 의상도 제조국은 인도네시아다. 하지만 영국 대표팀 의상 논란은 생산지가 아니라 다른 데서 불거졌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스텔라 매카트니가 디자인하고 아디다스 로고를 단 영국 대표팀 의상은 인도네시아에서 시간당 34펜스(약 600원)를 받는 근로자들이 주당 65시간씩 장시간 일해 만든 것”이라고 보도했다. ‘역대 최고의 윤리 올림픽’을 표방해 온 런던올림픽조직위원회(LOCOG)는 보도 직후 “바로 조사에 착수하고 결과를 발표하겠다”는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다. 영국 대표팀 의상은 ‘빨강 논란’도 불러일으켰다. 빨강·파랑·하양 3색이 들어간 영국 국기 ‘유니언 잭’을 소재로 디자인했지만 정작 유니폼엔 빨간색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네크라인에 가는 줄, 짧은 반바지 허리 부분의 얇은 줄이 빨강의 전부였다. 스포츠 과학자들은 “빨강이 상대 선수를 제압하는 심리적 효과가 큰데 아주 작은 실력 차이로 메달 색깔이 갈리는 올림픽에서 이런 디자인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옷을 디자인한 스텔라 매카트니는 “84년 이후 디자인된 영국 대표팀 의상 중 빨강이 가장 많고 국기 소재가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게 내 디자인”이라고 맞받았다.

 ‘짝퉁’을 입은 국가 대표 선수단도 있다. AP통신은 26일 “이집트올림픽위원회(EOC)가 돈을 아끼려고 런던 올림픽 출전 선수들에게 가짜 나이키 운동복을 줬다”고 보도했다. 마흐무드 아흐메드 알리 EOC 위원장은 AP통신에 “심각한 위기에 빠진 국내 경제상황을 고려해 ‘짝퉁’ 제품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집트 대표팀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선수인 욤나 크할라프에 따르면 EOC가 지급한 가방 앞면에는 나이키 로고가, 지퍼에는 아디다스 로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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